영국 정부가 은퇴자의 선택에 따라 일시에 거액의 연금수령이 가능하도록 연금개혁을 단행한다. 또 시중금리보다 높은 이자를 주는 은퇴자채권을 발행하기로 했다. 이러한 조치는 집권 보수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노년층 유권자를 끌어안기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19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날 영국 재무부는 대대적인 연금개혁 방안이 담긴 2014년 예산안을 내놓았다. 그동안 영국에서는 은퇴자가 확정기여(DC)형 연금을 일시불로 수령하면 55%에 달하는 고율의 세금을 매겨 은퇴시점에 분할지급 연금상품(annuity)에 가입하도록 사실상 강제했다. 그러나 이번 개혁안에서는 세율을 일반적 소득세율인 20%까지 낮춰 목돈을 일시에 수령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금융위기 이후 초저금리 상황이 지속되면서 노년층에서는 극히 낮은 금리를 주는 분할지급 연금상품에 대한 불만이 컸다. 한꺼번에 거액을 인출할 수 있을 경우 이를 은퇴자들이 주식·채권 등 다른 자산에 투자하거나 목돈이 드는 소비를 할 수 있게 된다.
FT는 이번 연금개혁안에 대해 "지난 1921년 이후 가장 큰 변화"라며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보수당의 핵심 지지세력인 노년층 유권자를 겨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니 알렉산더 재무부 수석 비서관은 "지금의 세제는 연금운용에 대한 과도한 간섭"이라며 "이번 개혁안은 은퇴자들이 자신의 돈을 어떻게 굴릴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연금안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은퇴자들이 일시에 수령한 목돈을 다 써버린 뒤 더 이상 재산이 없으면 정부 복지에 의존하는 경우가 늘 것으로 우려된다. 또 목돈을 굴리기 위한 부동산 투자가 늘어날 가능성도 현지 언론이 제기하고 있다. 가디언은 이날 "그동안 연금을 일시에 수령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가 많았지만 기존 정부가 이를 거부했던 것은 은퇴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야당인 노동당의 에드 볼스 예비내각(섀도캐비넷) 재무장관은 "은퇴자들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게 되면 잘못된 투자 선택에 따른 손해를 볼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연금개혁안이 발표되자 영국 금융시장에서는 후폭풍이 거셌다. 이날 영국 증시에서는 보험회사들의 주가가 급락했다. FT는 이날 하루 동안 보험사들의 시가총액 중 30억파운드가 증발했다고 전했다. 분할지급 연금상품을 전문으로 하는 보험사인 '파트너십' 주가는 이날 55%나 빠졌다. 영국에서는 매년 140억파운드에 달하는 분할지급 연금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또 확정지급(DB)형에서 DC형 연금으로 전환하는 가입자가 늘 것으로 예상돼 DB형 자산의 대부분이 투자되고 있는 영국 국채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DB형 연금의 자산은 1조1,000억파운드에 달해 이 중 일부 자산만 매각해도 금융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영국 정부는 은퇴자들의 자산운용을 돕기 위한 은퇴자채권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65세 이상에게만 판매되는 이 채권은 시중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개인저축계좌(ISA) 제도 개선안도 이번에 마련됐다. 기존 현금과 주식 계좌로 분리돼 있던 ISA 계좌를 통합해 연간 1만5,000파운드까지 세제혜택을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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