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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산책] 공주와 짐꾼의 길 다툼


당나라 이조(李肇)가 쓴 '당국사보(唐國史補)'에 '공주와 짐꾼의 길 다툼(公主擔夫爭路ㆍ공주담부쟁로)'이란 이야기가 있다. 양의 창자(羊腸ㆍ양장)처럼 굽이진 작은 길의 한가운데서 지체 높은 공주마마와 제 몸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짐을 둘러멘 짐꾼이 마주쳤다. 어느 일방이 길을 물리기 난감한 상황이었다. 서로 가던 길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갈 길은 가야 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둘의 어우러짐

자, 이제 공주와 짐꾼의 한바탕 춤 굿이 펼쳐진다. 들고 나고, 뻗고 구부리고, 숙이고 펴고, 밀고 빠지고, 올렸다 내렸다, 돌렸다 되돌렸다, 마주했다 등졌다, 실루엣 같은 공간의 여백을 두고 네 몸과 내 몸은 아스라이 조율 중이다. 그러니 여기서의 다툼(爭)은 윽박지르며 길을 뺏는 것이 아니라 두 몸의 어깨와 손과 허리와 다리를 조합해 서로 건너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저만치서 한 사내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당나라의 유명한 서예가 장욱(張旭)이다. 공주와 짐꾼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그의 눈앞에서는 지금 두 획이 여백의 조화를 구현하며 지르고 달리고 내리꽂고 삐치고 궁굴리는 중이다. 인간의 몸은, 그 몸짓은 자연이고 자연스러움이다. 천재 예술가 장욱은 이 순간 초서(草書)의 필법(筆法)을 터득해 '미치광이 초서(狂草ㆍ광초)'의 대가가 됐다.

동아시아의 모든 예술은 자연과 그것의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장욱이 그의 제자 최막(崔邈)과 안진경(顔眞卿)에게 스스로 초서의 필법을 터득한 경위로 설명한 공주와 짐꾼의 길 다툼이 어디 비단 서예만의 일이겠는가. 공간 여백의 묘미를 다스리는 장법(章法)은 소설 줄거리의 빠르고 완만한 흐름을 말하기도 하고, 공주와 짐꾼의 춤사위는 무용 그 자체이며 그 둘의 오붓한 선율은 말할 것도 없이 음율이다.

동아시아의 예술가들은 이처럼 대자연으로부터 예술의 영감을 얻고 감수성을 충전했으며 창의를 계발했다. 여름날 무시로 변하는 구름의 형상(夏雲多奇峰ㆍ하운다기봉)을 보고도, 숲 속에서 급한 새 한 마리 날아오르는 모습(飛鳥出林ㆍ비조출림)을 보고도, 놀란 뱀이 풀 속으로 달아나는 모양(驚蛇入草ㆍ경사입초)을 보고도 그들은 느꼈고 깨달았고 승화시켰다. 대지 위의 자연은 예술을 낳고 예술은 자연스러움을 낳은 것이다. 자연 위에 서고, 자연을 바라보고 기르는 것이야말로 창의의 원천이자 기반이라는 점을 동아시아 예술가들은 철저히 이해했다. 또한 이러한 예술정신은 본성 위에 서고, 본성을 성찰하며 본성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본이자 기저라는 철학적 사유의 동기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어깨싸움 대신 서로 움츠려 건너길

수미쌍관(首尾雙關)으로 가보자. 그런데 사실 공주와 짐꾼이 외길에서 마주한다는 설정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실상은 공주를 모신 가마꾼과 짐꾼이 외길에서 만나 서로 어찌할 바를 몰라 양보하는 품을 표현한 것이리라. 허나 후세의 말 좋아하는 이들에 의해 그 실상이 뜬금없이 공주와 짐꾼의 길 다툼이란 고사(故事)로 됐다 할지라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 둘의 어우러짐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웃음을 자아낸다.

가만 보니 우리 주변에도 공주라 불리는 이도 있고 국민이 지워준 짐을 짊어졌다고 말하는 짐꾼도 있다. 이들이 또 어떤 계제로 외길에서 마주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그 과정에서 서로 길 내놔라 어깨부터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 제 몸을 움츠리는 '미학적인 길 다툼'을 한번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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