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들이 10년 만에 최대 규모로 해외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다. 아베노믹스로 엔저가 가속화하고 고령화로 내수위축이 지속되자 막대한 현금과 금융권의 자금지원 등을 업고 미국·유럽·동남아시아 등으로 무차별 공습에 나선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4일(현지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스미토모미쓰이파이낸셜그룹(SMFG)이 영국 국영은행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의 미국 자회사로 소매은행인 RBS시티즌스 인수를 위한 초기 협상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RBS시티즌스는 자산규모 1,220억달러로 미 북동부·중서부 12개주에 1,400개 지점을 갖고 있다. WSJ는 "스미토모미쓰이가 미국 내 예금규모 15위인 RBS시티즌스를 인수하면 고대하던 미국 거점을 단숨에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RBS는 기본적으로 올해 말 RBS시티즌스 기업공개(IPO)를 통해 최소 100억달러를 조달한 뒤 오는 2016년까지 지분을 완전히 처분할 계획이다. 이 때문에 RBS는 IPO 금액 이상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협상성공 확률은 50% 미만이라는 게 WSJ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번 거래가 이뤄지면 100억달러 수준에 그치더라도 일본 기업의 역대 미 기업 M&A 가운데 세번째 규모로 기록된다. 미 금융권 M&A로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 규모다.
이미 일본의 미국 기업 사냥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일본 주류·음료업체인 산토리가 미 위스키 제조업체인 빔을 136억달러에 인수하기도 했다. 딜로직에 따르면 올 들어 일본 기업의 미국 기업 M&A는 167억달러 규모로 1995년 통계작성 이래 동기 대비 최대치를 기록했다.
일본 기업들은 추가 M&A도 준비하고 있다. 최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미국 무선시장의 독과점을 깨겠다"며 4위 무선네트워크 업체인 T모바일 인수를 시사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말 미 3위 이동통신사인 스프린트를 220억달러에 인수했다.
또 50억달러로 추산되는 일본 의류유통 업체 패스트리테일링의 제이크루 인수협상도 아직 불씨가 남아 있다는 게 블룸버그의 설명이다. 재팬토바코도 2012년 벨기에 담배업체 그린슨을 사들인 데 이어 추가 M&A를 물색하고 있다.
프런티어매니지먼트의 도시유키 미쓰자와 M&A 담당 수석은 "일본 기업들이 북미·유럽 등 글로벌 브랜드 인수에 목말라 있다"고 전했다. 일본은 동남아 등 신흥국 자산인수에도 적극적이다. 주류업체 기린은 필리핀 최대 맥주 업체인 산미구엘 경영권 확보를 목표로 지분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 미쓰비시UFC파이낸셜 역시 지난해 12월 태국 아유디야은행 인수에 이어 지난달 인도네시아·필리핀에서도 추가 M&A를 심각하게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해외 M&A 열기는 우선 일본에 실탄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비금융 일본 기업이 보유한 현금은 지난해 9월 말 현재 224조 엔(약 2조2,000억달러)에 달한다. 상장사 부채비율도 112%로 10년 전 195%의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대출금리 역시 올 1월 0.887%로 지난해의 0.821%보다 더 떨어지며 200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노무라의 집계에 따르면 다음달 1일 시작되는 새 회계연도에 일본 기업은 9조엔(약 878억달러)을 해외투자에 쏟아 부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일본 기업들은 정부가 다음달 소비세를 인상하면 경기 타격으로 일본은행의 돈 풀기도 가속화하며 엔화가치가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해외로 나가야 환차익까지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블룸버그 조사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소비세가 현행 5%에서 8%로 오를 경우 일본의 2·4분기 성장률이 -3.5%(연율 기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기업의 해외 투자 러시가 일본 경제에는 독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엔화약세에는 기여하겠지만 일본 내 투자 및 내수 확대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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