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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Story] 강신우 한화자산운용 대표

흥미없던 고시 접고 펀드매니저로 괴물 펀드 '바이코리아' 큰일 냈죠



알 파치노·더스틴 호프먼에 빠져 한때 영화감독 꿈꾸던 약골 소년
펀드라는 새 분야에 매료돼 첫발
IMF 거치며 둥지 튼 현대투신 히트상품 선보이며 펀드사 한획
투자환경 변화 맞게 전략 세우고 고객 최우선하는 마음자세 가져야


‘사육제’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작곡가 슈만은 법대 출신 음악가로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 음악가를 꿈꿨지만 막내아들이 가난한 음악가로 사는 것을 원치 않던 어머니의 바람으로 슈만은 법대에 떠밀려 진학했다. 흥미 없는 법 대신 피아노 공부에 시간을 쏟아부은 그는 결국 ‘법률가로 불행히 살기보다 돈 없는 음악가로 행복하게 살겠다’는 최후통첩과 함께 음악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성공이 보장된 길 대신 모험에 가까운 하고 싶은 일을 택한 그는 많은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낭만파 음악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강신우(52ㆍ사진) 한화자산운용 대표도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금융투자업계에 발을 내디뎠다. 법대 진학 후 전공서적보다 소설책을 더 많이 읽었다는 그는 “고시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지만 체력이 따라주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흥미가 없었다”며 “한번 고시에 낙방한 뒤 미련 없이 마음을 비웠다”고 말했다. 강 대표가 눈을 돌린 것은 당시로서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펀드매니저. 평소 영화감독,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각기 다른 재료를 한데 모아 최고의 시너지를 내는 일을 하고 싶던 그는 “다양한 자산을 모아 최고의 수익을 창출하는 펀드매니저의 역할이 내가 꿈꾸던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며 웃어 보였다. 확신을 갖고 뛰어들지는 않은 펀드매니저의 길에서 국내 펀드사에 한 획을 그은 ‘바이코리아펀드’가 탄생했고 강 대표에게 펀드매니저는 평생 직업이 됐다.

어린 시절 강 대표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학창 시절 날씨만 바뀌어도 몸살을 앓을 정도로 약골이었던 그는 수업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퇴하는 일이 많았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땀 흘리며 공을 차는 것도 어려웠다. 대신 소설과 영화가 소년의 벗이 됐다. “알 파치노와 더스틴 호프먼에 빠졌죠. 이들이 나온 영화는 섭렵을 했어요.” 강 대표는 요즘도 주말이면 영화관을 찾아 한주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는 한다.

학교 성적도 감수성만큼 뛰어났다.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은 물론 ‘조퇴하는 한이 있어도 결석은 안 한다’는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다. ‘우등생=서울대 법대’라는 생각이 대입의 정석이던 시절 강 대표도 흥미보다는 주변의 기대로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노는 것도 하루이틀, 슬슬 지루해졌다.

“1학년 때 놀던 친구들도 2학년이 되니 고시 공부에 들어가더군요. 저도 공부를 했지만 재미도 없고 여전히 체력도 약해 오래 앉아 집중하지 못했어요. 흥미까지 없으니 공부가 잘 됐겠습니까.”

결국 ‘기대의 메인 스트림’을 과감히 벗어나기로 했다. 강 대표는 “주변의 기대와 ‘이 학교, 이 과를 다니기 때문에 당연히 고시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다는 게 내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았다”며 “한번 고시에 낙방한 후 미련 없이 손을 뗐다”고 말했다.

타인의 기대가 만든 트랙 밖에 서니 새로운 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펀드매니저였다. 1980년대 후반 자본 자유화 등 자본시장이 본격적으로 꿈틀대며 관련 업권 및 업종에 대한 전망이 긍정적으로 조명됐고 그중 하나가 국내에는 이름도 생소한 펀드매니저였다. 강 대표의 머리에 문득 어린 시절 꿈꾸던 영화감독이 떠올랐다. 배우와 장소, 대사와 행동, 음향과 조명 등 제각각의 재료를 한데 모아 완성품으로 이끄는 일은 생각만 해도 짜릿하고 매력적이었다. 다양한 자산을 모아 최고의 수익률을 내는 일은 어떨까. 호기심이 생겼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1988년 강 대표는 한국투자신탁에 입사하며 펀드라는 세계에 뛰어들었다. “오직 이 길”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본인이 선택한 길이었지만 고민도 많아 한눈을 판 적도 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인생, 미래에 대해 대단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겠느냐”는 강 대표는 “처음 주어진 일에 적응하는 게 어렵다 보니 입사 초 잠시 다른 데 눈을 돌리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장 영화감독이 되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방송국 드라마 PD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생은 성의 없는, 준비 안 된 사람들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언론고시라고 할 정도로 몇 년씩 공부하는 사람이 많은 시험인데 나 같이 준비 없이 출사표를 낸 사람이 될 턱이 있습니까.”

방송 3사에서 한 차례씩 낙방의 쓴맛을 본 후 오히려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에 본격적으로 흥미를 느끼고 빠져들 수 있었다.

강 대표가 한국 펀드사에 한 획을 그은 펀드매니저로 성장하기까지 만만치 않은 고난도 있었다. 1988년 한국투자신탁운용에 입사한 뒤 8년 만인 1996년, 강 대표는 동방페레그린투자신탁운용 주식운용본부장(CIO)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에 대한 흥미와 열정이 한껏 고조됐을 30대, 큰 꿈을 안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1년 반 만에 암초를 만났다. 홍콩 본사가 1998년 동남아 외환위기 때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대규모 채권투자 손실로 파산하면서 같은 해 9월 국내에서도 영업정지에 이어 인가가 취소된 것이다.

‘있는 사람도 내쫓던’ IMF 시기. 강 대표는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었지만 ‘내가 이 엄동설한에 직업을 구하러 다녀야 하는 구나’ 하는 생각에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이 아팠다”며 “이 업계에 몸담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이라고 전했다.

이후 새로 둥지를 튼 현대투신은 ‘1세대 펀드매니저 강신우’를 성장시킨 터닝포인트가 됐다. 1999년 외환위기 직후 급격한 경기회복 속에 현대투신이 내놓은 바이코리아펀드가 시중자금을 흡수하며 그야말로 ‘괴물 펀드’로 부상한 것이다. 강 대표는 이후 PCA자산운용을 거쳐 2005년 한투와 동원증권 합병시 합병통합추진위원장을 맡으러 친정으로 복귀했고 한화자산운용 대표로 자리를 옮기기 전(2009년 9월)까지 부사장 겸 CIO로 활동했다.



펀드를 운용하던 CIO는 회사를 운용하는 CEO가 됐다. 강 대표가 느끼는 펀드매니저와 사장의 차이는 무엇인지 물었다.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펀드나 회사나 다 포트폴리오입니다. 차이는 회사가 생물체라는 거죠.”

펀드는 마음에 안 들면 편입종목을 쉽게 팔고 또다시 살 수 있지만 회사는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조직인 만큼 설득하고 질책하는 상호작용이 녹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강 대표는 “사람으로 이뤄진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는 데는 펀드운용과는 다른 또 다른 스킬이 필요한 법”이라며 “전략이 필요한 것은 펀드나 회사나 똑같지만 전략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고 이동시키는 측면에서 회사 운용이 펀드 운용보다 훨씬 어렵다”고 설명했다.

‘펀드업계의 호시절은 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강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자산운용업의 성장 전망은 매우 밝다”며 “이 업계에 와 있는 사람들은 행운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구 고령화 속에 자산운용에 대한 수요는 커지고 있지만 업계가 변화된 투자환경과 변화된 수요에 맞는 공급을 못해주고 있어 현 상황이 불황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내 주식의 내재 수익률이 낮아지고 금리도 낮아지고 있는 만큼 국내 주식형ㆍ채권형 상품 위주의 전통적인 라인업과 인력(매니저) 집중으로는 경쟁력이 없다”며 “자산 수요 상당 부분이 해외나 대체투자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만큼 운용사들도 제한된 자원(자금ㆍ인력)을 재조정하고 투자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후배 펀드매니저들에게도 “자산운용업에 뛰어들 때 목표했던 업무에만 매몰되지 말고 투자환경 변화에 맞게 새로운 자산ㆍ구조ㆍ전략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며 “자신에게 불리해도 고객을 우선시하는 마음가짐까지 더해진다면 장수하는 행운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강신우 대표는



▲1960년 인천 ▲1975년 부평고 졸업 ▲1983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88년 한국투자신탁 입사 ▲1996년 동방페레그린 투자신탁운용 CIO ▲1998년 현대투자신탁운용 주식운용팀 수석매니저 ▲2002년 PCA투자신탁운용 CIO ▲2005년 한국투자신탁운용 부사장 겸 CIO ▲2009년 한화투자신탁운용 대표 ▲2011년 9월~ 한화자산운용(한화투신운용ㆍ푸르덴셜자산운용 합병) 대표



합병 1년 반… 중간평가 점수는 100점 만점에 70점



해외·대체투자 확대로 체질 개선할 것

100점 만점에 70점. 강 대표가 한화자산운용의 합병 1년 반을 돌아보며 내린 중간평가 점수다. 한화자산운용은 2011년 9월 한화투자신탁운용과 푸르덴셜자산운용의 합병으로 재탄생했다. 합병 한화자산운용의 대표를 맡은 강 대표는 2005년 한투ㆍ동원 합병통합추진위원장 이후 또다시 서로 다른 조직의 물리적ㆍ화학적 통합을 이끌고 있다.

강 대표는 "모든 조직은 저마다의 독특한 문화가 있기 나름인데 운용사도 마찬가지"라며 "서로 다른 문화가 합쳐지면 상당한 충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운을 뗐다. 강 대표가 문화 충돌을 막고 안정적인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정한 원칙은 '최고의 관례(best practice)를 따르자'이다. 한화투신과 푸르덴셜운용이 저마다 각 부문별로 가진 업무 스타일 중 최고에 가까운 관례를 따르되 둘 다 베스트가 아닐 경우 외부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강 대표는 "합병 전 두 회사 모두 신뢰를 갖고 돈을 맡긴 고객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불안감을 없애주는 게 중요했다"며 "고객 중심의 합병이 되기 위해 가급적 급격한 변화를 지양하며 안정적인 통합에 집중했고 그 다음으로 최고의 업무 스타일을 적용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단 안정적인 통합은 성공했다는 평가다. 다만 선도회사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최고의 업무 체계, 스타일 도입은 일부 미진한 부분이 있다는 게 강 대표의 솔직한 속내다. 체질개선을 위한 노력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한화자산운용은 그동안 채권형 상품이 높고 리테일보다 기관투자 비중이 높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강 대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해외투자와 대체투자(AI)를 적극적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그는 "당장 성과가 나올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지만 수익률 등 트랙 레코드가 쌓이고 투자가 더해져 시장에서 인정을 받아야 투자자들의 돈이 들어올 것"이라며 "같은 맥락으로 올해 해외와 AI 씨앗을 뿌리며 사업을 강화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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