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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구원을 찾는 가을 산책


가을이다. 태풍의 격렬함과 태양의 뜨거움으로 스스로를 익혀 나타난 성숙이다. 산책이다. 공기는 걷기에 더없이 선선하고 대지는 한없이 가볍게 튕긴다. 낮은 산과 너른 들을 떠돌며 물아일여(物我一如)해 자기를 돌아보기 좋은 시절이다.

여름 여행은 주로 노동에 지친 몸을 쉬려는 휴식이지만 가을 산책은 상처 받은 영혼을 달래려는 치유다. 세계를 향한 거센 전진이 아니라 자기 구원을 향한 느릿한 완보이다. 꿈인 듯 현실인 듯 한없이 넘실대는 몽상에 잠겨, 멈춘 듯 움직이는 듯 천천히 걸음 걷는다.

여행이 대개 타자의 시공간으로 들어가 낯섦을 체험하는 일이라면 산책은 과거의 자기를 불러들이고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즉 자기의 시공간을 되사는 일이다. 장소에 추억을 불러들이고 기억에 장소를 붙박아둠으로써 과거의 자신을 되살리고 현재의 자기를 되돌아보는 행위다.

그러나 산책이 항상 따스하고 촉촉한 것만은 아니다. 700년 전,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갑자기 우리 영혼을 데리고 격렬하고 무시무시한 산책을 시작한다. 단테는 '신곡'의 첫 줄, 지옥으로의 여정이 시작되는 길 머리에 잊지 못할 표지 하나를 세운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네."



이 구절을 쓸 때 단테는 마흔 살이었다. 자기 고향에서 추방당한 자가 돼 집도 절도 없이 떠돌던 단테는 피렌체로 돌아갈 조금의 기약도 없이 동쪽 집에서 자고 서쪽 집에서 밥을 빌어먹는 신세로 전락했다. 좌절이 머릿속을 흔들고 절망이 가슴속을 채우는 날들 속에서 그는 타고난 시적 재능을 살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산책로를 계획한다. 지옥의 순례길 말이다.

단테의 의지에 따라, 멘토인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편한 길로 이끌지 못한다. 갈래길과 마주칠 때마다 그는 가장 섬뜩한 기억의 영토들로 안내한다. 자신의 악몽에 정직한 자만이 온전히 구원받는 법이다. 단테의 육신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단테의 정신은 결국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통해 연옥을 거쳐 천국에서 구원받는다.

요즈음 서점마다, 거리마다, 강연장마다 우리의 사람 모양을 되찾아주겠다는 멘토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표피만 손대는 바람에 상처는 낫지 않고 자꾸 덧나 시간이 갈수록 외려 괴물로 변하는 중이다. 단테에 따르면 구원의 빛은 자기의 가장 아프고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 한 번을 흔들려도 제대로 흔들리면 어른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이 가을, 단테를 본받아 한번쯤 끔찍한 산책을 계획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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