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2월11일,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의 섬 암본(옛 이름 암보이나ㆍAmboyna). 영국 동인도회사 지점에 네덜란드인들이 들이닥쳤다. 먼저 진출해 대규모 기지를 세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얹혀 더부살이를 하던 영국인들은 모조리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희생자는 모두 20명. 영국인 상인 9명과 포르투갈인 1명에 용병으로 고용된 사무라이 10명도 끼어 있었다. 일본인들이 왜 여기에 있었을까.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정책을 본격 시행하기 전인데다 정국 주도권 싸움(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해 낭인으로 전락한 무사들이 외국에서 살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당한 입장인 영국인들이 ‘암보이나 학살’로 부르는 이 사건의 원인은 향신료 다툼. 한때는 귀금속 가격과 맞먹었다는 후추보다도 10배나 비쌌던 스파이스(육두구와 정향) 독점경쟁이 피를 불렀다. 암본 사건은 세계사의 흐름을 갈랐다. 아시아 무역의 선발주자인 포르투갈에 공동으로 맞서자는 양국의 협력관계가 깨지고 두 동인도회사의 통합협정(1619년)도 물 건너갔다. 17세기 중반부터는 사이가 더욱 나빠져 네덜란드 문물이 영국으로 대거 유입된 명예혁명(1688년) 이전까지 양국은 세 차례나 전쟁을 치렀다. 암본 사건 이후 향료무역을 독점한 네덜란드는 번영가도를 달렸다. 향료를 대신할 해외무역을 고민하던 영국은 인도로 눈을 돌렸다. 교역 초기에 수입된 값싸고 질 좋은 인도산 면직물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인들은 기계를 통한 대량생산을 모색하고 결국에는 산업혁명의 씨앗이 뿌려졌다. 영국의 차선책이 낳은 대박은 단순히 운(運)에 불과했을까. 암본 사건의 충격과 무역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산업혁명이 일어나지도, 대영제국이 형성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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