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당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패리스 힐튼의 섹스 비디오를 본 저자 피터 노왁은, 화면에 나온 속살이 밝고 화사한 분홍색이 아니라 온통 에메랄드빛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 에메랄드빛은 조명 없이 어둠 속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유명한 걸프전쟁은, 공중에서 대공포화가 빗발치고 땅에서는 무시무시한 폭발이 잇따르는 장면들이 CNN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지구상에 중계되었다. 이라크가 몰락하는 그 장면들은 패리스 힐튼의 섹스 비디오와 마찬가지로 온통 에메랄드 빛이었다.
걸프전쟁과 섹스 비디오 사이의 이 모종의 관계는 그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오늘날 모든 가정이 구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전자레인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를 담당했던 레이더 기술을 종전 후 가정용으로 개발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프라이팬인 테팔 프라이팬은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부산물 테프론을 알루미늄 프라이팬에 결합시킨 것이다. 정크 푸드의 대명사이자 한국에서는 '부대찌개'라는 하이브리드 식품으로 재탄생한 스팸은 본래 전쟁 중 병사에게 필요한 높은 열량을 공급하고 오랜 기간 동안 보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개발된 전투 식량으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수많은 병사의 생명을 살렸다.
거대한 기술 창조자인 동시에 장기적인 얼리 어답터라 할 수 있는 군은 민간 기업에서 맡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너무 앞서 나가는 장기 연구를 주로 수행함으로써 현대의 기술 발전을 촉진시켜 왔다. 한편 포르노 산업 역시 얼리 어답터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인류의 전 역사가 증명하듯 전쟁과 섹스와 음식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사업일 뿐 아니라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게 된 현대에 이르러 전쟁과 섹스, 음식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둘러싸고 거대 산업이 발달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현대 기술문명의 역사란 이들 '나쁜 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빚어내고 있는 역사라는 것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간단하다. 현재를 만들어내고 있는 인류 문명의 자산이 실은 포르노, 전쟁, 패스트푸드라는 '나쁜 것들'을 통해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엉뚱해 보이는 이런 생각은 저자가 동원하는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구체적인 설득력을 과시한다. 1만7,000원. /우현석선임기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