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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여개 막고굴… 4세기 한 승려가 판 후 북위때 크게 늘어

■ 둔황 석굴사원<br>건축비 낸 황제·제후 벽화 많아<br>지금은 현대식 아파트처럼 단장

둔황 막고굴 전경. 석굴 바로 앞에서 입장권을 받고 있다.

둔황(敦煌)은 절벽을 깎아 만든 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둔황에는 모두 4개의 석굴군이 있다. 막고굴(천불동), 서천불동, 유림굴, 수협구굴(소천불동) 등이다. 이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것이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명사산 자락 깎아지른 절벽에 있는데 동굴만 700여개, 이 중 불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이 492개다. 둔황 석굴사원 하면 대개 막고굴을 이른다.

막고굴사원은 중국을 포함해 이곳을 지배한 국가들의 실크로드 경영방식을 보여준다. 막고굴이 일시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4세기 중엽 낙준이라는 승려가 처음 석굴을 파고 거주했다고 한다. 이후 하나 둘 다른 승려들이 모여들고 소문이 나면서 석굴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둔황의 지정학적 가치가 커지면서 국가가 움직였다. 중국 역사상 5호16국 시대를 거쳐 중국 북부를 통일한 북위는 서역과의 교통로를 다시 확보하려고 하서회랑에 대한 재지배 정책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둔황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종교가 유용하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불교도를 회유하기 위해 대대적인 막고굴 조성에 나섰다. 북위 시대에 건축된 석굴은 36개다. 이어 고구려를 침략하기도 했던 수나라도 막고굴 조성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110개, 당나라는 247개를 각각 만들었다. 석굴 내 벽화들이 대부분 황제나 지역 제후, 대형 사찰에 대한 그림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건축비를 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둔황은 동서교류의 감소와 함께 쇠퇴했다. 당이 멸망한 후 실크로드의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다. 중국이 혼란이 빠지면서 수입제품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15세기 이후 명의 쇄국정책이다. 명은 가욕관에서 산해관이 이르는 만리장성 속으로 후퇴하면서 대외교역에 소극적이었다. 가욕관 북쪽에 있는 둔황은 방치되고 그저 그런 오아시스 도시로 남았다.



19세기 초 이른바 막고굴 안에서 '둔황문서'가 발견되면서 둔황이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한대부터 당대까지의 경전 및 사회경제 사료가 석굴 한 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다만 고대의 사회경제ㆍ정치사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지 둔황이 다시 역사의 중심무대가 된 것은 아니다.

현재의 둔황 막고굴은 잘 꾸며져 있다. 베이징 소재의 관광지같이 관리가 잘된다. 진입로가 깨끗하고 석굴도 현대식 아파트처럼 단장했다. 관리국에 따르면 지난 한 해 70만명의 관광객이 막고굴을 방문했다고 한다. 사막 속의 오아시스라는 느낌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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