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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도덕적 제도, 비도덕적 관행

-柳晳基(정경부장)『이건 아니다. 「마녀 사냥」식으로 몰아붙여 정치적 효과는 얻을 지 모르나 문제의 뿌리를 끊으려는 자세가 아니다』 대전 법조비리 사건으로 법조계에 대한 개탄과 성토가 일고 있던 무렵, 친구인 중견판사는 한 저녁자리에서 다소 흥분했다. 백일하에 드러난 비리를 그냥 덮자는 얘기가 아님을 전제한 뒤, 친구는 우리나라 법원의 현실에 대해 침통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시·군단위 법원 조직인 지원(支院)은 직원수가 평균 40~50명. 전직원이 거의 매일 야간근무를 않으면 쌓이는 민원을 감당할 길이 없다. 그런데 지원장으로 일하던 4년전, 친구가 판공비 조로 손에 쥐는 액수는 한달에 겨우 35만원선이었다. 일과가 돼 버린 야근을 시키자면 직원들에게 설렁탕이라도 먹여야 한다. 직원들도 수당이 나오지만 제 돈으로 저녁 사먹으며 허구헌날 밤일 하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친구는 자신이 견뎌낸 「비법」을 실토했다. 한달에 수백만원씩 차오르는 저녁값을 해결하기 위해 부임 첫달은 10여년간 모은 용돈을 까먹으며 버텼다. 둘째달부터 사업하는 처남에 손을 벌리고 동문 선배들에도 고충을 호소했다. 그러나 석달을 못 가 자주 들르는 변호사에 전화걸어 밥값 영수증을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만 허허 웃고 말았다. 내가 아는 이 친구는 법원행정처가 현직 중견판사 가운데 청렴하기로 꼽힌다며 모지원에 발탁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승소를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않는 변호사들 앞에서 지원장이 월 수백만원의 허점을 드러내는 그 자체가 이미 「비리의 씨앗」이 아닌가. 법원의 현행 판공비는 모든 판사들이 고(故) 김홍섭(金洪燮) 대법관처럼 청렴·강직하기를 요구하지만 대부분 현직들은 과정이야 어쨌든 관행에 영합하는 범인(凡人)일 뿐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판공비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공직사회 만의 일이 아니다. 요즘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대출커미션이 공공연한 비밀이던 90년대중반까지 주요 시중은행에는 일선지점장이 매달 은행장을 독대하는 시간이 있었다. 겉으론 지점의 애로를 듣는다면서 A급 지점은 얼마, B급은 얼마씩 「비자금」 할당분을 걷곤했다. 외환위기 원인중 하나로 「금융부실」이 지탄받는다. 그런데 그 부실을 증폭시킨 배경은 엄격한 대출심사를 곤란하게 만든 커미션의 존재 때문이었고, 커미션으로 시작된 사모(私募) 판공비 조달관행이 급기야 「관치금융」「정치금융」까지 불러들였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별 것도 아닌 판공비 제도가 법조계에서는 전관예우 비리의 씨앗으로, 금융계에선 금융부실을 가속시킨 원인으로 비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유지해야 하는 최소한의 체면, 꼭 감안해야 할 정서, 뿌리치기 어려운 기대의 사슬로 곳곳이 칭칭 얽매여 있다. 돌이켜 보건대 「도덕적」 제도와 「비도덕적」 관행간의 이같은 엇물림을 못 본 척하면서 비리와 부조리·부정부패를 뿌리뽑겠다던 역대정권의 몸짓은 대개 말장난으로 끝나고 말았다. 도대체 정부가 공공부문의 판공비 내역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조사·공표한 적이 있는가. 현실은 어떤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정부가 「비리의 온상」을 제도적으로 방치해 왔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고 판공비를 무작정 현실화하자는 말은 아니다. 한정된 국가예산으로 판공비를 흥청망청 쓰게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분적인 현실화와 함께 판공비 소요를 줄일 수 있도록 관행과 생활문화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제도와 관행의 엇물림이 교정없이 오래 지속되면 관행은 마침내 제도를 틀어 버리는 파괴력을 발휘한다. 지난 93년 정부가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하자 당시 재경원 일각에서 「실명제 문화」의 필요성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실무자들은 실명제가 투명한 사회를 지향하는 도덕적 제도인 반면, 우리 사회의 관행은 여전히 「비실명」상태를 벗지 못했다는 데 착안했다. 각계각층이 비정상적 향응이나 「눈먼 돈」의 유혹을 분연히 뿌리칠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행이 하루빨리 눈높이를 맞춰야 실명화 제도가 온전히 착근할 거라는 논리였다. 그후 금융실명제는 정권말기와 IMF위기라는 엉뚱한 핑계를 틈타 껍데기만 남았다. 저질 정치가 실명제를 공중분해했다고 비판하지만 국민 다수가 실명제를 수용할 태세나 관행을 갖추려 얼마나 노력했는 지 한번 짚어볼 일이다. 관행의 변화는 법률·제도의 개혁만으로 풀 수 없는 사회문화적 과제다. 각계각층이 중지를 모아 폭넓은 공감과 동참을 이끌어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IMF 구조조정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이후 우리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제도개혁을 군말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때야 말로 우리의 묵은 관행을 한번 제대로 고쳐 볼 기회다. 현 정부가 주창하는 「제2 건국」운동이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하고 연구·실천한다면 누가 시비를 걸 것인가. /SKRYU@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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