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 연구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놓거나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오세정(58ㆍ사진)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은 서울경제와신문과의 신년 특별인터뷰에서 시종일관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기초과학연구원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한국은 1등 따라잡기를 통해 짧은 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일궈냈다. 여기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1등 따라잡기 대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리딩 전략이 필요하며 기초과학이 그 핵심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과학자인 패러데이가 개발한 발전기를 보고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물었습니다. 패러데이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답했죠. 당시에는 개발자조차 전기가 앞으로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 그 응용 가능성과 중요성에 대해 몰랐지만 그 같은 발견이 있었기에 지금의 전기시대가 열린 겁니다."
그는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간 것도 어떻게 보면 '돌로 무기나 식기 등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느냐'를 연구하는 응용연구보다 철이라는 아예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초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남이 하지 않는 독창적인 것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 원장은 "한국 사람들은 문제가 주어졌을 때 남보다 더 빨리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막상 문제를 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며 "창의력과 독창성이 부족하도록 돼 있는 시스템 구조에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담당 임원을 하다가 삼성종합기술원으로 옮긴 임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삼성전자에 있을 때는 1등을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다른 회사들이 먼저 뛰어들어 반도체 기반이 다 만들어져 나중에 가세했지만 '뭘 하면 되겠다'하고 길이 보일 때 기술자들이 100일 걸릴 것을 밤새워 80일 만에 이뤄내 앞선 제품을 출시해 성공한 경험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기원으로 옮겨서 뭔가 새로운 것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이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오 원장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서 4만달러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남을 따라 잡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분명히 지적했다.
결국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해결책은 기초과학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의 기초과학은 선진국과 비교해 처져 있는 상황이다. 올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발표한 세계 경쟁력 평가결과에 따르면 과학 인프라 경쟁력은 5위, 기술 인프라 경쟁력은 14위로 우수했지만 기초과학 분야는 이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다. 아직 노벨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고 세계 최고의 과학 논문 수에서도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다.
오 원장은 "그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이 주로 단기적인 문제 해결 및 상업화를 위한 응용과 개발위주로 펼쳐졌던 것이 큰 원인"이라며 "이제 정부의 정책도 기초와 원천 기술 연구로 방향을 틀어 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한 게 마일스톤(Milestoneㆍ중요한 단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은 당장 도입 가능한 기술개발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초연구는 정부가 지원해야 된다"며 "최근의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확대 기조를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유지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기초과학 연구 분야 중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으로 오 원장은 생명과학을 꼽았다. 물리ㆍ화학ㆍ재료 분야는 역사도 오래됐고 특히 재료 분야은 삼성전자 등 대기업이 많이 하니까 세계적 수준에 근접해 있지만 고령화와 맞물려 생명과학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의 인프라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상태라는 게 오 원장의 진단이다.
"세계적인 제약회사는 미국이나 유럽에 다 있죠. 기초가 허약한 국내 제약회사들의 수준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결국 외국의 약만 사다가 먹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 원장은 생명과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수월성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고의 석학을 데려와 국내에서 연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응용과학 분야에서는 1등을 따라가는 것이 가능하지만 기초과학분야에서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며 "필요하다면 외국인이라도 데려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기초과학연구원은 올해부터 오는 2017년까지 상위 1%의 저명ㆍ신진 과학자 등 해외 인재 500명을 유치하는 이른바 '브레인-리턴 500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오 원장은 "석학급 과학자 유치를 위한 사람 중심 지원체계를 확립해 안정적 일자리와 국제 수준의 처우를 제공할 계획"이라며 "이렇게 확보된 석학급 과학자를 매개로 우수한 젊은 과학자들이 활발히 유입될 수 있도록 다양한 신진인력 지원 프로그램도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외국인 과학자 유치를 위해서는 과학 생태계가 잘 조성돼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과학자들한테 지원은 하되 간섭은 최소화하는 분위기, 과학자들을 믿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현재처럼 '자금을 지원한 뒤 1년 만에 성과를 내놔라'하는 식은 곤란합니다. 국민 입장에서야 세금을 줬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수시로 알고 싶겠지만 잦은 평가나 간섭은 오히려 연구열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큽니다."
올해 총선과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과학 분야의 이슈는 뭐가 있을까. 그는 "과학기술 전담 부처의 부활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추진 중인 정부출연연구소 개편 마무리 작업이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이라며 "이러한 이슈들이 정치 논리가 아니라 과학 자체의 논리로 논의되고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과학기술 전담부처를 다시 만든다면 현 교육과학기술부를 초ㆍ중등 교육을 담당하는 부처와 과학과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부처로 분리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현 교과부에 교육과 과학이 합쳐져 있는 것에 대해 과학계 인사들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등교육과 연구개발이 대학에서 이뤄지는 만큼 교육과 과학이 합쳐져 있는 것은 이해하지만 초ㆍ중등 관련 교육 분야에 현안이 많기 때문에 미래를 논하는 과학이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았죠."
올해 새로 선출될 대통령의 과학정책 방향에 대해 오 원장은 "이명박 정부는 시작과 동시에 과학기술 청사진을 수립,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을 매년 10% 이상씩 늘리면서 2012년까지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중 기초 및 원천기술 투자 비중을 50%로 확대해왔다"며 "이처럼 기초과학을 중시하는 장기적 정책기조를 계속 이어가고 젊은 과학자들의 창의적인 연구를 지원하는 부분이 꼭 들어가야 한다"강조했다.
기초과학 역량 강화는 하루 아침에 얻어질 수 없는 만큼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근본적인 체질을 개선하고 연구작업을 축척해나가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노력을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까. 나온다면 언제일까.
그는 "한국 과학이 우수한 두뇌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는 것을 세계 수준의 연구자들도 인정하고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10년 안에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1953년 서울 ▦1971년 경기고 졸업 ▦1975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82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 이학 박사 ▦1984년~현재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천문학부 교수 ▦1989~1994년 대통령자문 21세기 위원회 위원 ▦2004~2005년 교육부 2단계 BK21 사업기획단 위원장 ▦2007~2009년 한국과학재단 이사 ▦2011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2011년 11월25일~현재 기초과학연구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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