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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삼성가 장손의 회한과 다짐


지난주 두 가지 재판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하나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무죄 판결이고 또 하나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항소심 3년 실형 선고다. 아이러니한 것은 원 전 국정원장의 판결은 현직 부장판사가 "상식과 순리에 어긋난 궤변"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유죄 가능성도 높았지만 무죄로 판명됐고 이 회장은 검찰이 주장한 비자금 조성이 무죄로 밝혀져 집행유예가 점쳐졌지만 결론은 유죄였다는 것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이 회장의 상심이 깊었을 듯싶다. 비자금 604억원 횡령 혐의는 무죄 판단이 내려졌고 배임과 조세 포탈 혐의도 상당 부분 무죄가 선고돼 유죄로 인정된 범죄액수가 줄어든 상황이었다. 억울함에 가슴도 쳤을 것이다. 이 회장이 횡령 피해액 전부를 변제한데다 지난 2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구자원 LIG그룹 회장이 피해액 변제를 근거로 집행유예로 감형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액수도 두 총수보다 적었고 과거에는 그룹 경영을 위한 불가피한 관례로 인정받아 실형을 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이 잘못을 회피할 수는 없다. 사회는 점점 투명해졌고 기업을 향한 잣대는 더욱 엄격해졌다. 이런 시대정신을 간파하지 못했거나 모른 체하면서 잘못된 관행을 답습했다면 그룹의 총수로서 응당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맞다.

피해액 변제 불구 3년 실형 받아

더욱이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던 삼성가의 장손이 아닌가. 낙담에 빠져 울분을 토로할 것이 아니라 힘들었던 과거를 되돌아보고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1971년 어느 날은 12살짜리 어린이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끔찍이 아끼던 할아버지(고 이병철 삼성 회장)가 삼성가 장남인 아버지(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그룹 경영권을 박탈해 3남인 삼촌(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넘겨준 일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긴 세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불화와 그로 인한 아버지의 방황을 지켜보며 몰래 눈물을 훔친 날도 많았으리라.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덕을 보지 않고 홀로 서겠다는 굳은 다짐을 수없이 했을 터. 고려대 법학과 시절 주변 친구들조차 그가 삼성 창업주의 장손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일화나 대학 졸업 후 가족 몰래 입사시험을 보고 씨티은행에 들어간 일 등은 그런 연유에서였으리라.



20여년이 흐른 1995년 삼성그룹의 분리·매각 방침에 맞서 CJ의 전신인 제일제당을 독립시킬 때 이 회장의 다짐은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보란 듯이 기업을 키워 삼성가 장자의 정통성을 인정받겠다는 의지는 결국 CJ그룹을 2013년 기준 자산 24조원, 매출 28조원에 이르는 재계 14위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독립 당시 삼성 그룹 내 계열사에 불과했던 제일제당에 성공 DNA를 심어 1조5,000억원의 매출액을 20년도 안돼 18배 이상 급성장시킨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의욕이 넘쳐서였을까. 200km로 질주하던 이 회장 앞에 일단 멈춤의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해 8월 받았던 심장이식수술에 부작용이 생기는 등 건강도 극도로 악화됐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때쯤 중대 고비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회장이 정신적 지주로 삼은 그의 할아버지도 인생 행로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광복 후 서울에서 번창했던 사업은 6·25로 폭삭 주저앉았고 4·19 이후에는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지탄을 받았다.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만들려던 꿈은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1966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1968년 다시 복귀, 회장에 취임해 한국 경제의 거목이 됐다.

국민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CJ 키워야

이번 재판과정과 수감생활 기간 동안 이 회장은 또다시 눈물을 훔치면서 뼈저린 반성과 함께 남다른 다짐을 했을지 모른다. 역경을 딛고 반드시 우뚝 서 할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손자가 되겠노라고….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속죄의 마음은 국민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삼성가가 아니라 미래의 대한민국을 품고 CJ를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다. 병세가 깊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져 '비운의 황태자'가 아닌 '삼성가의 장손'으로 마지막일지도 모를 다짐이 꼭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홍준석 생활산업부장 jsho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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