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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의 공포를 넘어라] 글로벌 위기 현장을 가다 <2부-1> 스페인

청년 실업률 50%… 집값 50% 뚝… 메워지지 않는 침체의 골<br>실업수당 4분의 1로 줄고 긴축에 공무원 연봉 삭감<br>서민 소비 급격히 얼어붙어 성장률 3분기 연속 마이너스<br>부실 핵심고리 은행 개혁… 관광 위주 산업구조 수술<br>경직된 노동 환경도 바꿔야


지난 7월30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 정부종합청사 안에 있는 사회보장센터는 오전부터 실업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몰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갓난아이를 들쳐 업은 여성부터 지팡이를 짚은 노인까지 줄잡아 40~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상담 대기표를 받아 들고 초조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리카르도 가르시아(51)씨는 전기배관공으로 3년 전부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반실업 상태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올해 들어서는 사정이 더 심각해져 6개월간 단 한번도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처음 실업수당을 수령할 때만 해도 한달에 최대 1,800유로(251만원)를 받았지만 지금은 수령액이 4분의1도 안 되는 400유로로 줄었다"며 "아내가 가정부 일을 해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처지"라고 털어놓았다. 한참 동안 신세한탄을 하던 그는 "빨리 수당을 신청해야 돈을 받을 수 있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사회 최하층으로 굴러 떨어지는 서민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소비시장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마드리드 중심가인 스페인광장 주변에는 리모델링을 한다며 세입자들을 모두 내보냈다가 돈을 구하지 못해 흉물처럼 된 대형 빌딩이 세 동이나 덩그러니 서 있다. 중심가에서 서너 블록만 가면 문을 닫고 철시한 상가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동산 버블 붕괴로 집값이 2007년 최고점 대비 절반 가까이 폭락하자 졸지에 막대한 불량대출을 끌어안게 된 시중은행들도 처지는 비슷하다. 한때 스페인 최대 은행이었던 바네스토 은행은 예금을 맡기면 40인치 소니 3D TV를 준다는 광고를 내걸었다. 하지만 이날 마드리드 중심가 은행들에서 상담을 하는 손님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 은행에 들어가 "예금이 많이 들어오느냐"고 묻자 "보다시피"라는 자조 섞인 답변만 돌아왔다.

스페인 소비시장의 거대축인 공무원들도 연봉삭감이 불가피한 처지다. 이날 정오에는 마드리드 시벨레스가(街) 인근에서 긴축에 반대하는 공무원 수백명이 모여 깜짝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시위대는 30분 만에 해산했지만 여름휴가 기간에 시위를 하는 것 자체가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평가다.

스페인의 긴박한 경제상황은 각종 지표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페인의 올 2ㆍ4분기 실업률은 24.63%를 기록해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가입 이후 최고치를 또다시 갈아 치웠다.

경제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경제규모도 쪼그라들고 있다. 2ㆍ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4%로 지난해 4ㆍ4분기 이후 3분기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스페인 재정위기의 도화선이 된 집값 하락세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2ㆍ4분기 주택가격지수는 전년 대비 8.3% 떨어져 2009년 2ㆍ4분기 이후 최악의 낙폭을 나타냈다. 스페인 집값은 2007년 최고점과 비교해 거의 50%가량 하락한 상태다.



스페인 제3당인 공산당(PCE)의 마누엘 페르난데스 경제담당관은 이날 당사에서 기자와 만나 "냉정하게 봤을 때 위기가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스페인 경제가 1990년대 일본과 같은 초장기 불황에 빠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지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광과 건설업에 치우친 산업구조를 수술해 제조업을 육성하는 한편 경직된 노동환경과 비효율적인 공무원ㆍ연금 시스템 등에 메스를 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부동산 버블 붕괴→은행대출 부실화→재정악화→국채금리 급등(국채 값 폭락)으로 이어지는 부실의 사슬에서 핵심 '고리' 역할을 한 은행 부문 개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미국 은행권이 정교한 리스크 판단 없이 '불량' 주택담보대출 채권과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고강도 구조조정에 직면했듯이 스페인 은행들도 강력한 구조조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스페인 정부가 금융개혁을 미룬 채 은행권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유럽연합(EU)에 1,000억유로에 달하는 은행 지원금을 요청하는 사이 스페인에서는 1,630억유로(1~5월 기준)의 자본이 빠져나갔고 부실채권 규모는 4월 현재 1,527억유로로 껑충 뛰었다.

페르난데스 담당관은 "집권당 지도자들이 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구조조정이 늦어졌다"며 "은행 비리를 파헤칠 수 있는 위원회 설립을 요구했지만 여당의 반대로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저축은행 부실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우리나라가 귀담아들을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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