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 서울 중구의 한 시내면세점. 해외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이제 막 결제를 하고 나온 30대 여성의 손에는 1,139달러가 선명히 찍힌 영수증이 들려있었다. 다음주 동남아 여행을 떠나기 전 면세점에서 가방을 샀다는 그는 "면세점에서 시중보다 20~30% 저렴하게 살수 있는 것 같다"며 "자주 쓰는 화장품과 선글라스 등을 더 둘러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가방을 산 목적과 면세품 구입 한도에 대해 묻자 "당연히 내가 쓸 것"이라며 "귀국 시 400달러까지만 반입이 허용되는 것은 알지만 걸리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날 시내 면세점을 찾은 많은 내국인들은 해외여행을 기회 삼아 시계나 가방, 화장품 등을 싸게 사려는 사람들이었다. 면세점이 내국인들에게도 열려있는 이유가 해외에서 사용하거나 여행 중 휴대품을 구입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잊혀진 지 오래였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내국인 면세점 매출액은 20억7,500만 달러로 2010년보다 11%나 증가했다. 이용객수도 1,360만 명에 달했다. 내국인 면세점 매출은 2007년 19억 달러에 육박하다 세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2009년 12억 달러까지 떨어졌지만 금세 예전 기세를 되찾는 모습이다.
국내 면세점들은 내국인 고객 유치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특정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추가할인을 해주거나 2개를 함께 사면 더 깎아 주는 방식이다. 사은품을 주고 회원카드 포인트를 쌓아주거나 대량 구매자를 대상으로 콘서트에 초대하는 등 일반 백화점과 비슷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었다.
내국인 면세점 매출이 느는 상황은 겉으로 보면 긍정적이다. 유통업계에는 많이 팔아서 좋고 소비자들은 질 좋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세점이 국내에서 주로 소비할 제품을 세금 없이 사는 공공연한 창구로 둔갑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세금 수입이 줄어들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고 구매력까지 갖춘 사람들에게만 면세 기회를 주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한 40대 직장인은 "해외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텐데 누구는 꼬박꼬박 세금이 붙은 상품을 사고 누구는 면세혜택을 받는 건 잘못돼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내국인 면세품 구매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법적 장치도 있지만 사문화된 지 오래다. 관세법과 그 시행규칙 등에 따르면 출국 내국인은 해당 여행국에서 사용할 물품과 선물에 대해 3,000달러까지 살 수 있지만 이를 다시 한국으로 가져온다면 400 달러어치만 반입할 수 있다.
그러나 400달러 제한을 어기고 그 이상의 물품을 들여오는 관광객이 수두룩하고 현실적으로 모든 관광객의 휴대품을 하나하나 조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규정은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또 갑작스런 통관 검사에 대비한 여러 꼼수들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어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마다 나름의 노하우가 하나씩 있을 정도다.
20대 회사원 장 모씨는 "지난해 국내 면세점에서 1,200 달러가 넘는 가방을 산 뒤 여행지에서 매고 다니다 들어왔다"며 "혹시나 걸릴까 하는 두려움은 있었지만 일부러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 껴서 입국장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30대 회사원 김 모씨는 "면세점 구매 내역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될 때 외국에 있는 친구ㆍ친지에게 선물하고 왔다고 핑계를 대면 된다고 들었다"며 "몇 차례 한도를 넘겨 구입한 적은 있는데 한 번도 적발된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동행자에게 본인이 산 물품을 대신 들게 해 입국 심사를 통과하는 '가방셔틀'도 오랜 수법이다.
관세당국도 모든 여행자를 대상으로 일일이 관세허용 초과 여부를 검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관세청 관계자는 "인력이 제한돼 있고 여행자 불편을 최소화하는 한편 마약 등 위해 물품 등의 밀반입도 단속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 여행자만 선별해 검사 중이다"고 설명했다.
면세점 또한 이 같은 오랜 관행을 인정한 듯 소비자에게 면세품 구매 한도를 설명하기보다는 많이 파는 데 급급하다. 시내 주요 면세점에 걸려있는 내국인 구매 한도 안내문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글씨로 써 있어 대부분 고객이 그냥 지나쳐 버린다.
해외여행이 아니더라도 면세품을 구입할 수 있는 제주도 내국인 면세점 확대도 논란거리다. 제주 관광활성화와 국제자유도시 개발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2002년 12월 첫 문을 연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공항ㆍ항만 면세점은 2003년 개장 이듬해 매출액이 1,007억 원대였지만 8년 만에 3배로 성장해 2011년 3,383억원을 기록했다.
제주도 면세점은 현재 주류ㆍ담배ㆍ화장품ㆍ향수ㆍ시계ㆍ인삼류ㆍ문구류 등 15개 품목을 판매하고 있는데 출국장 면세점과 마찬가지로 매장 상당수를 해외 명품브랜드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해외 브랜드를 열심히 팔아 남긴 돈으로 제주도 발전에 쓴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세금 회피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내국인의 면세 쇼핑 확대에 대해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내국인 면세품 구입 확대는 해외 쇼핑을 줄이는 등 긍정적인 효과도 있고 현재 법으로도 관세허용기준(400달러)을 정해져 있다"며 "크게 문제 삼을 만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