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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층 마천루와 62층짜리 쌍둥이 빌딩, 대규모 컨벤션센터, 판매시설. 기존의 코엑스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 삼성동에 조성될 현대차그룹 삼성동 통합사옥의 밑그림이 공개됐다. 이미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한국전력 사옥 부지를 사들였을 때부터 대한민국 부동산1번지 강남의 지형도를 다시 한 번 바꿔놓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나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지금은 없던 일이 됐지만 '만약' 성수동 삼표레미콘 부지에 애초 계획대로 같은 건물이 지어졌다면 어땠을까. 좌초된 프로젝트를 굳이 다시 언급한 것은 여전히 적지 않은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의 통합사옥 프로젝트가 본격화한 계기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서울 시내의 대규모 민간 부지에 대한 개발 구상을 밝혔을 때로 거슬러 간다. 당시 시는 공공기여를 전제로 기존 용도가 사실상 폐기된 서울 시내 1만㎡ 이상의 부지에 대한 용도변경을 통해 개발을 허용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당시 가장 관심을 모은 곳이 바로 성수동 삼표레미콘 공장 부지였다. 정몽구 회장의 사돈 기업인 삼표그룹 소유의 이 땅을 매입해 110층짜리 글로벌비즈니스센터를 짓겠다는 구상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임직원 2만명 상주 지역경제 활기
하지만 이 계획이 서울시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현대차그룹은 대안으로 삼성동 한전 부지를 택했고 10조5,5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써냄으로 성수동에서 좌절된 통합사옥의 꿈을 뒤늦게 이룰 수 있게 됐다.
입지로 따지자면 삼성동 한전 부지와 성수동 삼표레미콘 부지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삼표레미콘 부지 일대는 서울숲과 아직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뚝섬 상업용지 일대를 제외하고 나면 별 볼 일 없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간 성수동 글로벌비즈니스센터 프로젝트에 미련이 남는다. 기업이 움직이면 사람이 움직이고 돈이 움직인다. 통합사옥에 상주하는 현대차그룹 임직원은 2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가져올 유무형의 파급효과는 낙후된 서울 동북권에는 더 없는 호재가 될 수 있었다. 주변에는 없던 상권이 생겨 지역 경제에 활기가 돌고 상당수의 임직원이 출퇴근을 위해 주변에 집을 얻게 됐을 것이다. 사옥 건립 대가로 기부채납한 땅에는 다양한 공공시설이 들어서 고스란히 지역 주민에게 혜택이 돌아갔을 것이다. 사옥 예정지가 변경되면서 이처럼 크고 작은 수혜 대상지 역시 성수동이 아닌 삼성동으로 바뀌었다.
물론 서울시가 현대차의 성수동 사옥 건립 계획을 반대한 것에도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 서울시가 마련한 도시계획은 도심과 부도심 지역에서만 100층 이상의 초고층 건축을 허용하고 있다. 도심이나 부도심이 아닌 성수동 부지에 사옥 건립을 허가하는 것은 도시계획과 부합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당연히 이를 허용하는 것은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소지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서울시가 통 큰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 끝내 안타깝다. 한강을 경계로 강남과 강북이 느끼는 개발의 온도 차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강남·북 간 집값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갈수록 벌어지고 뉴타운으로 대표되는 강북권 재개발이 곳곳에서 좌초하는 사이 강남권 재건축은 정부의 정책 지원까지 더해지면서 탄력이 붙는 양상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강북에 있던 기업이 강남으로는 옮겨도 강남에 있던 기업이 한강을 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성수동 사옥 계획이 백지화하면서 대기업이 강남에서 강북으로, 그것도 도심이나 부도심이 아닌 곳에 둥지를 틀 수도 있었던 기회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정부가 최근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해 도입한 '입지규제 최소구역'의 대표적 모델은 싱가포르다. 주목할 것은 싱가포르 정부의 파격적 선택이다. 홍콩·상하이·두바이 등 경쟁 도시의 추격에 위기감을 느낀 싱가포르 정부는 성공을 위해 투자자인 샌즈그룹에 카지노 허용이라는 당근책까지 제시했고 이 같은 결정은 정체에 빠졌던 싱가포르 경제에 '신의 한 수'가 됐다.
강남·북 개발 격차 줄일 기회 놓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민간의 투자유치 활성화 계획을 발표할 때마다 늘 '파격적인 혜택'을 말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투자 유치는 용두사미가 되고 만다. 정작 민간이 원하는 진짜 '파격'은 없기 때문이다. 기업을 움직이고 싶다면 정부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기 앞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기업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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