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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겨울 여름옷 입은 국민안전


6년 전 뉴욕특파원 시절 아내가 전염성 질환 의심 증세를 보여 꽤 고생한 적이 있다. 어깨 부근에 종기 같은 것이 올라왔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지면서 병원 문을 두드려야만 했다. 급한 마음에 뉴욕의 종합병원을 찾아갔더니 증세의 원인부터 찾아야 한다며 몇 가지 검사를 먼저 하고 다시 오란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 "검사부터 받고 오라니… " 원망스러웠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5~6개 검사를 했는데 딱 1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결핵 양성 반응이 나온 것이다. 어깨에 물혹처럼 부푼 게 결핵성 종기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닐 수도 있고 의심은 가는데 원인은 불명확했다. 결핵이 어떤 질환인가. 치유가 잘 되지만 공기로 전염돼 유행이 빠른 편이다.

싹싹하고 친절해 보이던 의료진은 안면을 싹 바꿨다. 아내를 즉시 격리 병실로 옮기더니 3일 동안 이런저런 검사와 증세 확인에 들어갔다. 마스크 없이는 아내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종기 제거 수술을 받은 후에도 격리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해외여행은 안 됩니다. 혹 해외로 나가면 입국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퇴원을 앞두고 담당 의사의 당부가 기가 막혔다.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따지듯 다시 물어보니 "출국하는 것은 자유지만 우리는 보건당국에 증상을 보고할 것이고 출입국 당국에도 통보될 것"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큰 맘먹고 작심한 캐나다 여행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고 넘치는 미국의 방역시스템

아내 퇴원 후에 한 번 더 놀랐다. 주 정부 보건당국에서 간호사를 집으로 보낸 것이다. 말이 좋아 방문이지 감시나 다름없었다. 하루 세 번씩 한 움큼만한 처방 약을 잘 먹는지, 차도는 있는지 살피려온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국인의 체질적 특성상 결핵 양성반응이 곧잘 나온다고 한다. 전염성이 없는 비활동성 결핵이 특히 그렇다고 한다.

가족이 겪은 고생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라서 필요 이상의 대가를 치렀을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미국의 공중 방역 시스템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병원과 보건 출입국당국 간 유기적 시스템은 잘 작동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중요시하는 나라임에도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에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학교에서 기침만 해도 아이를 조용히 불러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나 눈이 1㎝만 쌓여도 휴교령을 내리는 것도 국민의 안전을 뒷전에 돌릴 다른 가치가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정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메르스 사태는 1년 전 세월호 참사를 겪고서도 후진적 위기대응 시스템이 여전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준 것에 다름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공공의 권한을 제때 행사하지 않아 화를 키웠다. 온라인에 짝 깔렸는데도 병원정보 공개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하지만 국민이 부여한 권한 행사를 누구나 수긍할 만한 정당한 조치로 인식되지 않으면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과잉 대응이 아닐까, 괜한 불안감을 조장하는 것 아닌지 혼란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제 식구 감싸는 유착 관행이나 소통 부재도 화근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종종 공권력이 땅에 떨어졌느니, 정부는 뭘 하느니 해도 정작 권한 행사의 정당성이 어디까지냐, 정부 개입은 어느 수준까지 합리화되느냐는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공안은 있는데 국민안전은 어디에…

우리의 치안과 공안 시스템은 때론 과잉 논란을 빚을 정도로 치밀하고 탄탄하다. 그런데도 같은 공공의 이익인 방역과 재난시스템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다스린다'는 개념에 치중한 구시대의 유물에서 여태껏 벗어나지 못해서가 아닐까. 5년 단임 직선제로 바뀐 1987년 체제 이후 민주화는 획기적으로 진전됐건만 공공의 이익과 국민 안전은 후진 시스템 그대로다. 최경환 국무총리 직무대행 겸 경제 부총리가 한 화제의 발언을 빗대자면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있는 게 국민 안전체계 아닌가. "정책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미국 정책학자 토마스 다이의 정의가 언뜻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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