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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사람들 눈이 번쩍 뜨일 나라
[주거복지 틀 다시짜자] 선진국서 배운다 - 일본이젠 양 보다 질… 고령자용 등 특화 임대주택으로 궤도수정노후주택 철거해 녹지율 높이고 노인 시설 세워도심 접근성 떨어지는 임대단지 축소·용도 폐기
진영태기자 nothingman@sed.co.kr
일본 도시재생기구(UR)가 도쿄 무사시노시에 1950년대 공영임대주택을 재건축한'무사시노 미도리 파크(왼쪽)'와 '산바리에 사쿠라즈츠미 단지(오른쪽)'는 40%에 달하는 높은 녹지율로 주거의 질을 개선했다.
도쿄의 대표적인 번화가인 신주쿠에서 지하철 중앙선을 타고 서쪽으로 40분이면 이 일대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으로 꼽히는 무사시노시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1,200가구 규모의 '무사시노 미도리파크' 주택단지다. 지난 1950년대에 지은 공영임대주택을 2003년 재건축한 곳으로 여기에서 최근 일본 임대주택의 변화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입구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노인개호(보호ㆍ요양) 시설이 있고 부지의 40% 이상이 녹지여서 그린벨트가 무너진 도쿄에서 보기 드문 녹색 공간을 제공한다. 최고 12층인 개별건물 중 대부분 고령자용 임대주택인 저층부에는 문턱을 없애고 곳곳에 안전 바를 설치하는 등 고령자를 배려한 시설을 설치했다. 낡은 4~5층의 주택단지를 재건축하면서 고령화 사회에 맞게 주거의 질을 개선한 것이다.
단지를 공급ㆍ관리하는 일본 도시재생기구(URㆍUrban Renaissance Agency)에 따르면 단지의 30% 이상이 60대 이상 노인가구로 구성됐으며 일부 빈 집은 고령자용으로 추가 리모델링 중이다.
◇주택공급 초과로 임대주택 줄여=지난 60년 동안 공급 확대에만 주력했던 일본은 최근 공공임대주택의 양보다는 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분별한 양적 팽창 정책이 저출산ㆍ고령화라는 벽에 부딪혀 빈 임대주택이 늘어나자 수요에 대응하는 임대주택 공급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획일적으로 지어진 후 30~40년이 지나 노후화된 임대주택을 철거하면서 고령자용 임대주택, 차상위 계층용 임대주택 등을 늘려나가는 추세다.
일본 국토교통성에 따르면 2003년 311만7,000여가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던 일본의 공공임대주택 공급은 2008년 300만6,000여가구로 60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1968년 이후 40년간 20% 미만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던 전체 임대주택물량 중 공공임대주택의 비중도 그해 18.4%로 낮아졌다.
한국의 한국토지주택공사(LH) 격인 일본 UR의 총무팀 카마다 오사무 주간은 "도심 접근성이 떨어지는 임대단지는 단지축소와 용도폐지의 수순을 밟고 있다"고 전했다.
◇주거 수준 높인 고령자용 임대주택 등 늘려=일본은 전체 임대주택 수를 줄이는 대신 주거 수준을 높인 고령자용 임대주택과 계층별로 특화된 임대주택 비중을 늘리고 있다. 고령화에 대응하는 한편 차상위계층을 고려한 임대주택 정책이다. 각 단지에는 노인보호ㆍ요양 시설과 카페ㆍ유치원 등의 커뮤니티시설을 확충해 구성원 간 유대를 강화하는 '마을만들기'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또 기존 주택을 철거하면서 조정된 땅은 녹지화시켜 친환경적인 주거 환경을 만들었다. 무사시노 미도리파크 단지 인근에 재건축된 '산바리에 사쿠라즈츠미 단지(1,120가구)'의 경우 기존 1,829가구에서 700여가구를 줄이며 녹지율을 42%까지 높이고 단지 내 실개천을 복원하는 등 주거의 질을 향상시켰다.
카마다 주간은 "리뉴얼과 리모델링 등 기존 주택의 상품성을 높이는 작업을 통해 수요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임대정책의 변화는 UR의 개명과정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1955년 '일본주택공단'으로 시작해 대도시 지역의 집단주택건설과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을 진행해오다 1981년 '주택ㆍ도시정비 공단'으로 바뀐 뒤 기존 주택의 재건축 등 도시정비임무를 담당했다. 이후 공공임대주택이 294만가구에 이르고 가구당 주택 수가 1대1.13으로 공급초과에 이르자 1999년 '도시기반정비공단'으로 다시 개명한 후 주택분양사업에서 손을 뗐다. 2007년에 이르러 일본 정부는 신규주택공급의 원칙적 폐지론과 함께 4번째 개명을 단행해 도시재생기구를 탄생시켰다. 현재 UR라는 명칭에는 임대주택은 더 이상 신축이 아닌 기존주택의 '재생(Renaissance)'이라는 정책 철학이 담겨 있는 셈이다.
"신축 대신 재건축·리뉴얼"
저출산 영향 재고·빈집 늘어 골머리
지난 1950년대부터 임대주택을 공급해 상당한 노하우를 쌓은 일본이지만 여전히 정책적 고민은 깊다. 저출산 및 고령화는 물론 주택의 노후화와 높아지는 공실률, 추가재원 부족 등의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 임대주택을 공급한 지 20년을 갓 넘긴 한국이 머지않아 겪을지 모를 미래인 셈이다.
일본 정부는 임대주택사업에서 발생한 복합적인 문제로 추가건설 제한 및 철수전략까지 세워놓았다.
실제로 2007년 일본 정부는 도시재생기구(UR)에 더 이상 임대주택을 신축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한때 최대 80만가구의 임대주택을 관리해온 UR는 올해 76만가구로 가구 수를 줄였으며 오는 2018년까지 4만가구를 더 감축할 계획이다.
이는 저출산ㆍ고령화가 지속돼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의 임대주택 재고량도 과잉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2008년을 기준으로 일본의 총 가구 수는 4,997만가구인 데 반해 총 주택 수는 5,759만가구로 가구당 주택 수는 1.15가구에 달한다. 이중 빈집도 757만가구로 13.1%에 달한다.
1970년대 이전에 건설된 주택이 전체 공영임대주택물량의 43%를 넘어서면서 노후화 역시 심각한 상태다. UR 측은 16만가구를 재건축하되 나머지 노후주택은 리뉴얼을 통해 유지해나갈 방침이다.
경기침체로 지난 10년여간 월세 수입이 고정되다시피 해 대규모 주택개선작업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나가히사 노부코 요코하마시 주택계획계장은 "인구급증기(1960~1980)에 대규모로 건설된 임대ㆍ분양주택이 노후화ㆍ공실 등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며 "재건축마저 쉽지 않아 단지재생을 위한 다양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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