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 23’은 기성복처럼 익숙하면서도 말끔하게 뽑아낸 스릴러물이다. 영화의 감독은 조엘 슈마허. 그의 이름이 낯선 관객들이라도 적어도 그가 만든 영화 한편 정도는 봤음직하다. 그 동안 그가 만들어온 영화들은 ‘세인트 엘모의 열정’, ‘사랑을 위하여’, ‘배트맨 포레버’, ‘오페라의 유령’, ‘8미리’ 등. 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남기진 못했지만 적어도 관객에게 적당한 만족을 줄줄 아는 감독이다. ‘넘버 23’ 역시 조엘 슈마허의 영화답게 무난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관객을 스토리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는 서구 사회에서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숫자 23에 대한 음모론을 기초로 했다.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가 새벽 1시23분에 발생하고, 타이타닉이 침몰한 1912년4월15일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23이 된다. 9ㆍ11테러가 발생한 2001년 9월 11일의 숫자도 합치면 23이 된다. 게다가 2를 3으로 나누면 0.666이 된다. 영화는 서구인들에게 이처럼 불안한 숫자로 각인돼 있는 23이라는 숫자를 소재로 스릴러 한편을 만들어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야생동물 보호소에서 일하는 평범한 가장 월터(짐 캐리). 그가 생일날 떠돌이 개에 물려 약속시간에 늦는 동안 그의 아내 아가사(버지니아 매드슨)는 동네 헌책방에서 눈에 띄는 빨간색 표지를 가진 ‘넘버 23’이란 제목의 책을 발견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숫자 23에 연관돼 있다는 기이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아가사는 월터에게 생일선물로 준다. 이후 월터는 이 책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고 자신의 생일, 집주소, 아내와 처음 만난 날 등 자신과 연관된 모든 수치들이 대한 23이라는 숫자에 관련돼 있다는 망상을 품게 된다. 이후 책 속의 내용과 현실을 혼동하며 점점 그는 미쳐간다. 영화의 설정만 보면 ‘오픈 유어 아이즈‘나 ‘메멘토’처럼 복잡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스릴러가 떠오른다. 하지만 감독은 이 설정이 가진 가능성대신 그 동안 여러 스릴러 영화들에서 써왔던 익숙한 플롯을 대거 끌어들인다. 때문에 초반 신선하게 시작했던 영화는 중반이후부터 과거 어디선가 본듯한 이야기로 도배된다. 이런 익숙함이 신선한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을 실망시킬 만도 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유려하게 끌어가는 솜씨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덕에 무난한 시간 때우기용 영화를 찾는 관객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점점 미쳐가는 주인공을 섬세하게 연기한 짐 캐리의 연기가 볼만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이은 또 한번의 진지한 연기로 코미디 배우라는 기존 인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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