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은 왜 '거꾸로 금리정책'을 펼쳤을까.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떨치던 벤저민 스트롱 2세 뉴욕연준 총재는 증시가 과열로 치닫던 1927년 금리를 올리고 보합이던 1928에는 세 차례나 금리를 내렸다. 교과서와 정반대 금리정책은 결과적으로 주가 대폭락(1929년)을 불렀다. 경제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히는 스트롱의 엇박자 정책의 배경은 국제 공조. 잉글랜드은행을 도우려 비정상적 정책을 썼다는 게 정설이다.
△스트롱은 오랜 친구인 몬터규 노먼 잉글랜드은행 총재와 협력하면 국제금융시장 안정을 꾀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문제는 편협성. 프랑스와 독일이 반대해도 영국과 공조만으로 문제 해결을 기대했었으나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대공황 발생 직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이미 폐결핵으로 작고(1928년)한 스트롱을 '살인보다 더 나쁜 죄악을 저지른 인간'이라고 혹평했다. 경제대통령으로 기대를 모았던 후버 또한 스트롱만큼 심각한 과오를 저질렀다.
△공황기 미국 산업을 보호한다며 관세를 대폭 높인 결과 전세계 무역량이 3년 만에 3분의1로 떨어졌다. 제한된 국제공조의 실패와 이기적 무역정책은 대공황을 전세계로 확산시켰다. 경제사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문제의 본질을 미국의 지도력 부재로 꼽는다. 1차대전 이후 '영국은 의지가 있으나 실력이 없었고 실력은 갖춘 미국은 의지가 없어 국제금융의 구심점이 흐려지며 2차대전 전까지 세계경제의 혼란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추가 양적완화 축소에 나서며 신흥국을 배려하는 표현을 담지 않아 국제공조 붕괴론이 불거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시 미국을 도왔던 신흥국들은 시장 혼란을 겪으며 미국을 맹비난하고 있다. 신임 재닛 옐런 Fed의장이 핵심국과 공조를 강화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제한적인 국제공조와 나만 생각하는 미국의 연준, 지도력 부재…. 상황이 닮아도 너무 닮았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소름이 돋는다. /권홍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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