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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종합상사] 3. 정부도 `절반의 책임`

지난 98년, 그해도 저물어가는 12월초 어느 날 서울의 한 호텔. 국내 7대 종합상사 경영기획팀장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는 산업자원부의 고위간부도 자리를 함께 했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수출밖에 없습니다. 종합상사가 앞장서야 합니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무역수지 흑자 500억달러 달성을 위해 더욱 분발해주십시요.” 산자부 간부의 격려가 이어졌다. 하지만 사실상 `올해에도 연말 밀어내기로 정부 체면을 세워달라`는 주문이었다. 당시 이 자리에 참석했던 A종합상사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목표 달성을 위해 기업들에게 실적을 억지로 끼워맞추라고 관례적으로 요청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대부분의 종합상사들은 다음해 3월치 수출물량까지 앞당겨서 수출실적으로 잡은 반면, 수입은 줄여 정부의 기대에 부응했다. ◇정부도 분식회계 공범=박정희 정권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속도를 높여가던 지난 75년, 일본의 소고쇼샤(綜合商社)를 본딴 한국식 종합상사 제도가 도입됐다. 무역업체의 대형화와 전문화를 통해 수출을 더욱 촉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정부가 내건 종합상사에 대한 혜택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종합상사는 자본금 10억원ㆍ수출실적 5,000만달러ㆍ해외지사 10개 이상 등의 자격요건을 갖춰야 했다. 하지만 지정 된 후에는 ▲국제입찰 경합 시 우선 지원 ▲원자재 수입요건 개방 ▲완제품 비축구매를 위한 로컬신용장 개설 허용 및 수출금융지원 ▲외국환은행 다수거래 허용 ▲보증신용장의 회전사용 허용 ▲50만달러 이상의 해외지사 외환자금보유 허용 등 당시로서는 엄청난 특혜를 제공했다. 그 해에만 삼성물산, 대우실업, 한일합섬, 국제화학, 쌍용 등 5개사가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SK글로벌의 전신인 ㈜선경은 76년 11월 종합상사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종합상사들은 외형 불리기에 나섰다. 종합상사들은 마구잡이식 기업인수와 밀어내기 수출을 경쟁적으로 벌였다. 또 수익성과는 상관없이 부풀려진 실적을 바탕으로 국내 은행은 물론 해외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끌어와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 등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 종합상사의 기획담당 임원은 “당시로서는 국가경제 부흥이라는 목표를 위해 정부와 종합상사 모두 어떻게든 수출을 늘리고, 해외자금을 끌어들여서라도 사업을 벌여야 한다는데 이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관행처럼 굳어진 분식회계=“분식회계는 종합상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대기업이 분식회계를 자연스럽게 해왔다. 물론 대우그룹도 건설, 자동차 등 사업을 팽창하면서 여러가지 금융기법과 회계방법을 이용했으며 모기업이었던 ㈜대우가 그 가운데 있었다.” ㈜대우에서 회계업무를 담당하다 대우사태와 함께 옷을 벗은 B씨의 증언이다. A씨는 “분식회계 하면 먼저 종합상사를 떠올리는 것은 잘못됐다. 다만 개발독재와 정경유착이라는 한국 경제의 특성 때문에 그룹의 핵심사업을 담당하는 계열사가 그런 회계관행을 많이 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재벌들이 사업팽창을 위해 부실을 숨겼고, 정경유착 과정에서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권과 정부가 이를 용인하거나 정책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합상사가 분식회계의 주범이라는 오해를 받는 이유는 그룹차원의 금융센터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종합상사는 해외 곳곳에 퍼져있는 법인을 통해 현지에서 자금을 조달해 신사업에 투자했다. 이 과정에서 부채가 쌓이고 신사업이 실패하면서 부실은 커져 종합상사가 다른 계열사의 부실까지 떠안는 결과를 가져왔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해외에서 이자가 싼 자금을 빌려서 금리가 높은 국내나 제3국에 대출해 차익을 보는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C종합상사의 관계자는 “그룹차원에서 대규모 해외사업을 벌이거나 신사업을 추진할 때 대부분 가장 매출실적이 좋았던 종합상사가 자금을 조달했다”며 “이 과정에서 종합상사가 그룹의 부실을 떠안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부실 종합상사 교훈] 그룹 수출창구投 안주 `위기 자초` 지난 99년초 대우그룹 사태가 터지기 불과 몇 달전, ㈜대우는 대규모 승진인사를 실시했다. 98년말 ㈜대우가 삼성물산을 제치고 수출 1위를 달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대우의 대표이사는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언론은 대우맨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보도에 앞장섰다. 하지만 ㈜대우의 상황은 몇 달만에 완전히 뒤바뀌었다. 해외에서 금을 수입해서 곧바로 수출하는 거래방식으로 수출액을 늘리는 등 거품투성이었던 ㈜대우는 대우그룹의 유동성 위기와 함께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당시 ㈜대우에서 경영기획을 담당했던 C씨는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당시 삼성물산 등 다른 종합상사들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내실위주로 경영방향을 급선회했던 데 반해 ㈜대우만 확장위주의 경영을 지속했었다. 대우만이 변화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은 아니다. SK글로벌은 82년 고 최종현 회장의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경만이 다룰 수 있는 상품을 100여종 정도는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특화전략을 추진했으나, 경영실적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84년에는 실질적인 결손이 6억3,800만원에 불과했고 당기순이익은 49억100만원이었지만, 85년에는 이월결손금이 55억3,900만원으로 불어났다. 실적위주의 출혈 수출, 해외사업의 실패 등이 주원인이었으며 이 같은 수익성 악화의 고리는 90년대 들어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회계장부속에 감춰진 부실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현대종합상사에서 기획업무를 맡았던 D씨는 “90년대 들어서면서 종합상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이 축소됐고 외부여건이나 정부의 종합상사에 대한 특혜도 많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종합상사는 새로운 수익사업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며 “그룹의 수출창구 역할에 만족하고 위기감을 갖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수익원 창출의 실패는 부실을 털어낼 수 있는 자생능력을 만들지 못했으며,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부실이 분식회계나 자본잠식 등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종합상사 지원 변천사] 각종 특혜 사라져 `귀하신 몸` 대접 옛말 정부의 종합상사 정책은 우리 경제의 발전과 환경에 따라 쉴 새 없이 변해왔다. 정부는 종합상사가 만들어진 지난 75년 이후 20년 가까이 전폭적인 지원으로 종합상사 수출활동의 장애물을 치워줬으나 지금은 종합상사에 대한 특혜는 사실상 사라졌다. 지난 75년 4월 종합무역상사 육성방안이 발표되면서 종합상사는 `세계시장에서 국제적 경쟁력의 획득과 상품의 판매가 가능하도록 수출을 특화시킨 기업군`으로 키워지기 시작했다. 국내 기업들이 해외시장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시절에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주문생산된 것이다. 종합상사로 지정되기 위한 초기 자격요건 가운데 자본의 최소 요구수준 조항이 78년 삭제되고, 국가 총상품수출금액의 2%를 차지하는 기업이 종합상사의 자격을 얻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역적 수출다각화 조건은 81년에 철폐돼 새로운 수출시장의 개발이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 같은 요건을 갖춘 종합상사들은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종합상사는 해외에서 신용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에서 로컬신용장을 발행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국내 구매를 위한 대출담보로 로컬신용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 수요가 없더라도 수출할 상품을 미리 재고로 확보하는 것도 가능했다. 수출신용을 통한 자금조달은 종합상사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줬다. 당시 실질이자율이 10%가 넘었음에도 불구 수출신용은 거의 이자가 붙지 않았으며, 이마저도 신용장만 있으면 쉽게 대출이 가능했다. 76년의 경우 종합상사들은 1달러당 공식환율 480원 대신 420원을 적용받았으며, 일반은행 대출에 대한 이자율 17% 대신 8%만 물면 됐다. 높은 수출실적을 내는 종합상사는 신용대출용 신용장을 제출하는 것조차 면제됐다. A 종합상사의 B사장은 “이 같은 특혜를 얻기 위해 70~80년대에는 기업들이 서로 종합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며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 인수합병을 통한 덩치키우기가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특혜는 정부가 목표한 수출실적 달성을 위해 무리한 밀어내기에 종합상사들이 경쟁적으로 협조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으며, 종합상사 스스로의 경쟁력보다는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기업체질을 만드는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금융시장이 개방되면서 정부의 일방적인 지원은 점점 축소되기 시작했고, 최근 몇 년새 종합상사가 누리는 혜택은 사실상 사라졌다. 종합상사들은 은행에서 다른 기업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종합상사가 누렸던 수출신용에서의 우대는 사라졌고, 일반대출도 기업의 신용등급에 따라 이자율이 결정돼 부채비율이 높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일부 종합상사는 다른 기업에 비해 오히려 불리한 입장이다. C 종합상사의 기획담당 임원은 “이제는 종합상사를 위한 정책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종합상사라고 해서 혜택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나쁜 이미지만 갖는 게 현실”이라며 “정부가 요구했던 밀어내기 수출관행 등도 없어졌다”고 말했다. <조영주기자 yjch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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