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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기다림의 열매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 필자가 열여섯이 되던 해에 발레뤼스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모나코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세계적 수준의 발레학교로 10위 안에 들만큼 유명했던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는 세계 각국의 유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특히 우리보다 발레를 일찍 받아들이고 많은 기업과 황실에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일본에서는 많은 유학생들이 발레학교로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주말이 되면 3~4일의 짧은 휴가 그리고 여름, 겨울방학이 되면 이태리ㆍ스위스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필자는 어려웠던 집안 형편 때문에 여행은커녕 한국에 나올 수조차 없었으니 가족들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요즘처럼 통신수단이 발달됐을 때도 아니어서 한 달에 두 번 편지로 안부인사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발레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넉넉하지 않았던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졌지만 내가 그토록 발레를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묵묵히 도와주며 기다려줬다. 정말 발레가 하고 싶어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것이 아직도 늘 마음이 아프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워 가족들이 고생하면서도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열의를 갖고 노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시절들을 보내고 8년 만에 다시 학교를 찾았을 때는 연습실도 늘어나고 모든 것들이 현대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무 바닥에 땀이 스며들어 특유의 냄새가 나던 연습실에 그 냄새가 나지 않아 불현듯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그곳은 나에게 있어 좋은 발레리나로 살아갈 수 있는 테크닉을 터득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인내하는 방법과 시간들을 보내게 해준 곳이기에 매우 특별하고 감사한 곳이다.

함께 유학을 했던 동기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과 재독 안무가 허용순, 후배 발레리나 강수진은 현재 국내외 발레발전을 위해 활발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이들도 본인의 능력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하고 때를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들을 거쳤기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들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발레를 배우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을 보면 무조건 빨리 이루면 좋다는 생각에서인지 이런 과정들은 생략한 채 단편적인 결과물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마음 졸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최고급 포도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훌륭한 토양ㆍ품종ㆍ햇빛ㆍ바람이라는 조건과 함께 포도가 숙성되는 시간 또한 필요하며 품질과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능력 외에도 선생님의 가르침과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선생님과 자녀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 '기다림'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더 빼어나고 값진 예술의 열매를 제공할 수 있는 튼튼하고 건강한 나무가 자라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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