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암환자가 병원을 찾았다. 수술이 불가능한 상황. 의사는 항암제를 처방하려고 한다. 수많은 약물 가운데 어느 하나 또는 몇 개의 조합을 선택해야 하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 모든 환자는 그저 '평균인간'으로 간주된다. 최근 분자진단기술과 표적항암제 등의 개발로 개별 환자의 특성을 반영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여전히 평균인간이라는 가정과 의사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처방을 받게 된다. 환자 개개인의 특성과 서로 다른 발병원인은 고려되지 않은 채 평균지표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질병을 포함한 많은 생명현상 이면의 복잡성과 이를 다루는 기존 생명과학의 본질적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자칫 소외되는 경계의 과학 될 수도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생명과학의 발전을 목격하고 있다. 생명체를 자동차에 비유하면 구성요소의 상당 부분에 대한 부품 리스트가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의 동작원리를 이해하려면 부품들이 서로 어떻게 조립되고 상호 작용함으로써 자동차의 다이내믹스를 만들어내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생명현상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분자 수준의 생체 구성요소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체의 기능을 만들어내는지 분자 네트워크의 비선형(非線形ㆍNonlinear) 다이내믹스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직관적 해석에 의존하는 전통생물학, 정적인 데이터의 통계적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생물정보학 연구로 이를 탐구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생명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간주하고 수학 모델링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분석을 통해 다이내믹스를 분석, 숨겨진 동작원리를 찾아내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는 생명과학ㆍ정보기술의 융합학문인 시스템생물학이 대두되고 있다.
21세기 들어 새롭게 조명 받으며 여러 선진국에서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시스템생물학은 생명현상의 근원적 메커니즘 발견 등 기초생명과학의 발전뿐 아니라 신약개발과 개인맞춤형 치료에 응용되는 시스템의학으로 진화해가며 새로운 고부가가치 산업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생명과학과 정보기술 응용의 숨겨진 블루오션인 것이다. 시스템생물학의 발전으로 이제 우리 모두는 평균인간 처방에서 벗어나 나만의 고유한 특성이 고려된 맞춤형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현대과학의 변화는 우리에게 앞으로 전개될 패러다임의 방향을 암시한다. 바로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현이 학문의 경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시스템생물학이 생명과학과 시스템공학의 경계에서 창발됐듯이 앞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융합과학이 기존 학문의 경계에서 꽃피게 될 것이다.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경계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융합과학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 가속될 것이다.
자유로운 생태계 조성 적극 나서야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 경계의 과학을 잉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생태계를 갖추고 있을까. 융합과학은 기존 학문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어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어느 학문분류에도 속하지 않아 쉽게 소외될 수 있다. 특히 우리처럼 학문 분야별로 과학자들의 동질성과 유대관계가 강한 사회에서는 그런 위험이 더욱 크다. 여기에 융합과학에 대한 정부부처의 피상적 이해가 더해지면 위험은 가중된다.
경계의 과학이 소외되지 않고 자유롭게 잉태될 수 있도록 과학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선도하는 과학 분야를 창출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이 지름길이 덤불에 가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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