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에 가봐야 공순이나 식모, 여기선 뼈가 삭는 물질 밖에 답이 없는 섬 처녀 유자는 중얼거렸다. "앙큼한 년". 유일한 탈출구는 고깃배 여럿 가진 구회장네 아들인데, 짝꿍인 경숙이 채갔다. "내가 먼저 애를 뱄어야 했는데." 속앓이를 해봐야 박은 깨졌다. 겨우 임신이란 희망으로 달려가지만, 동엽은 질색팔색 섬을 떠나고 있다. ('동백꽃' 요약)
최근 4년간 발표한 단편 8개를 모은 천명관의 소설집에는 거창하거나 극단적인 이야기가 없다. 앞서 인용했듯 답이 없는 섬 처녀거나, 정리해고 당한 직장인, 창작의지를 잃은 인기 소설가, 트럭 운전사였던 막노동꾼, 3만원만 바라보는 대리기사, 잠 못 드는 편집자 등 하나같이 무언가에 집착하고 고통받지만 누구에게 쉽게 말하고 동의받을 성질은 아니다. 그저 고단한 삶에 혹시나 하는 기대들이 엇갈리고 희망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맨 앞 작품 '봄, 사자의 서'에는 겨울밤 공원 벤치에서 동사한 50대 남자의 영혼이 어리둥절 억울한 듯 현실을 떠돈다. 간절히 원한 것도 피하려 애쓴 것도 모두 허사다. 담배 생각은 끊이질 않고 스치는 기억은 하나하나 막막하다.
어쩌다 예까지 왔냐면 대답이 마땅치 않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게" 된 거다. 그저 비타민을('파충류의 밤'), 신경안정제를('핑크'), 소주를('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털어넣을 뿐이다. 그렇게 견뎌도 끝은 도로(徒勞), 역시 쉽지 않다. 그래도 답답한 인생담이 힘을 얻는 건 역시 작가 특유의 '이야기의 힘'이다.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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