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와 페루 간 131년 묵은 해상경계선 분쟁이 종지부를 찍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양국이 조정에 나선 결과다. 칠레가 관할해온 분쟁수역의 절반 이상을 페루에 넘기는 내용의 합의에 일부 불만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공평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립의 골이 패였던 것은 1879년부터 시작된 태평양전쟁. 4년여 전쟁으로 완승을 거둔 칠레는 승자의 권리를 대부분 내줬지만 양국은 감정의 앙금을 씻고 공생 발전할 기회를 얻었다.
△전쟁의 발단은 자원. 독일의 프리츠 하버가 합성 암모니아를 개발(1918년)하기 전까지 최고의 천연비료로 각광 받던 거대한 퇴적새똥(구아노)과 화약의 원료인 칠레초석 광산을 지배하려는 국제자본이 칠레를 꼬드겨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 일대가 불길에 휩싸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연전연승한 칠레는 1883년 앙콘조약을 통해 오늘날 영토의 3분의1을 얻었다. 해안 400㎞를 빼앗긴 볼리비아가 내륙국가로 전락한 것도 이때부터다.
△금싸라기 자원지대를 얻어 고성장하던 칠레의 번영도 오래 못갔다. 자원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란이 일어나 정권이 뒤집혔다. 자원을 둘러싼 원조 태평양전쟁은 중남미 3개국 모두의 파탄으로 귀결났다. 칠레와 페루 간 해양 분쟁의 종식은 열강이 씨 뿌린 갈등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태평양 해안지대를 뺏긴 볼리비아의 칠레에 대한 원한 해소가 남았지만 19세기 태평양전쟁은 마침표를 향한 고비를 넘었다.
△반면 일본이 일으킨 20세기 태평양전쟁은 겉으로만 종식됐을 뿐 상흔은 지워지지 않았다. 전범국가인 일본은 번영하고 침략당했던 한국은 분단을 겪은 것도 모자라 친일 논란 등 사회분열의 악성종양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상처는 치유되기는커녕 날로 깊어만 간다. 꽃다운 처녀들을 성노리개로 내몰았던 야만행위를 부인하고 침략마저 미화하는 일본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화해는 요원하다. 20세기 태평양전쟁의 미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권홍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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