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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건축가 안도 다다오 설계
거대한 조각 있는 진입로 지나면 하늘과 산을 품은 '물의 정원'
원래 있던 경사로 그대로 살려 내부 들어갈수록 더 큰 공간 경험
건물 밖엔 왕릉 모티프 '돌의 정원'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관은 명상과 몽환적 분위기로 가득
그곳의 봄은 달콤한 설탕 굽는 내음을 타고 온다. 500만 송이의 진홍색 패랭이꽃이 만들어낸 달달한 향기가 '뮤지엄 산(SAN)' 방문객을 제일 먼저 맞는다. 물과 바람, 빛과 소리로 명상적 건물을 짓는 안도 다다오(74)가 설계한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치고는 너무(?) 로맨틱할 정도다. 지난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통하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고 세계 3대 건축가로도 꼽히는 안도가 전원형 미술관으로 만들어놓은 이곳은 강원도 원주시 오크밸리 안에 둥지 틀고 있다. 해발 275m, 산(山) 중에 있다고 '뮤지엄 산'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공간(Space)과 예술(Art), 그리고 자연(Nature)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며 그 영문 머리글자를 모아 만든 이름, 뮤지엄 산(SAN)이다.
미술관 진입로에서는 눈도 즐겁고 발도 가볍다. 패랭이꽃밭 가운데 자리 잡은 거대한 주황색 조형물은 마크 디 수베로의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라는 긴 제목을 가진 움직이는 조각이다. 폐산업재료를 활용해 홉킨스의 시에 등장하는 황조롱이를 형상화한 작품인데 육중한 강철빔이 바람결에 움직이며 인공과 자연의 협연을 보여준다. 꽃길은 자작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모두 미술관이 들어서기 전부터 있던 진짜 이 땅의 주인들이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미덕인 곳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큰딸인 청조 이인희(87) 한솔그룹 고문이 2만2,000평 부지에 자신의 소장품 4,000점을 내놓아 조성한 미술관이다.
건축가 안도는 건물 진입로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접근과정에서의 경건함으로 안쪽에서 만나는 '주인공'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는 제의적 공간해석이 탁월한 인물. 또한 벽을 지그재그로 세우는 방식 등을 써서 공간을 한번에 다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길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그 너머를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모서리를 돌며 펼쳐지는 예상 외의 풍광에 감탄사를 터뜨리게 하는 게 특기다. 꽃의 정원(Flower Garden)을 지나 만나는 물의 정원(Water Garden)이 그렇다. 건물을 둘러싼 해자(垓子·성곽을 둘러싼 도랑) 같은 이곳에는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서 가져온 짙은 색 해미석을 바닥에 깔았다. 수심은 20㎝밖에 안 되지만 물은 새까만 돌로 거울이 돼 하늘을 비추고 산을 품는다.
워터가든에서 미술관 건물로 이르는 길에 알렉산더 리버먼의 거대 조각 '아치형 입구'를 지나게 된다. 사찰의 일주문 같은 역할을 작품이 대신한다. 황토와 짚을 섞어놓은 듯한 자연색의 미술관 벽면은 일명 '파주석'으로 조성했다. 안도의 트레이드마크는 노출 콘크리트지만 이곳 경관에 어울리는 동시에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자연석을 재료로 택했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미술관으로 들어선 관객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가슴이 열리고 시야가 넓어지는 자연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건축가가 치밀하게 계산해둔 공간원리가 숨어 있다. 몰라도 상관없으나 알면 흥미로울 비밀. 미술관 부지는 갈수록 낮아지는 경사로인데 안도는 천장을 수평으로 먼저 맞춘 다음 건물을 설계했다. 그 결과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층고가 점점 높아지게 된다. 처음 들어오면 건물 자체에 집중하게 한 다음 갈수록 들어오는 빛의 양을 늘려 더 큰 공간을 경험하도록 이끈다. 돌과 철로 만들어진 차가운 건물은 빛을 받아들이고 물과 산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점차 온기를 머금는다. 이름처럼 공간과 예술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대목이다.
이런 효과가 극대화된 공간 중 하나가 백남준의 1991년작 비디오 설치작품 '파우스트 7채널-건강'이 놓인 청조갤러리 3관 원형전시장이다. 고딕 성당 양식의 구조물 안에 25개의 모니터를 쌓아둔 백남준의 작품은 천장으로 쏟아지는 자연채광과 돌벽이 감싼 이 공간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전시장 내 기획전도 볼거리지만 곳곳에 숨은 예술품이 즐비하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면 전시장과 벽 사이 복도격 공간에 조성된 '의자 전시'를 챙겨봐야 한다. 안도가 건축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제안한 '건축가들이 만든 디자인 의자'들이 상설전 형식으로 선보이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 찰스 매킨토시, 미스 반 데어로에를 비롯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찰스와 레이 임스, 프랭크 게리 등 세계적 건축가가 만든 의자는 그들의 건축관을 대변한다. 건축이 진정 고려하는 것은 그 안에 들어와 공간을 이용할 '사람'임을….
건물을 빠져나오면 돌의 정원(Stone Garden)이 펼쳐진다. 한국의 왕릉을 모티프로 9개의 돌무더기가 듬성듬성 놓였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조성돼 있다. 중간중간에는 미국 작가 조지 시걸의 '두 벤치 위의 연인', 프랑스 출신 베르나르 브네의 '부정형의 선', 미국의 대표적 미니멀아티스트 토니 스미스의 '윌리' 등 미술 교과서에 등장하는 명품 조각들이 놓여 있다. 굳이 값을 따지자면 최고가 작품은 영국의 현대조각가 헨리 무어의 '누워 있는 인체'로 방문객에게 단순하게 묘사된 인체를 보며 도시생활의 찌든 때를 벗어버리고 자연을 만끽하라고 청한다.
이제 이곳 뮤지엄 산에서 느끼는 감탄의 절정이다. '빛의 미술사'로 불리는 세계적 예술가 제임스 터렐(72)의 작품 5점을 모은 '제임스터렐관'이다. 종이에 물감 대신 공간에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인지라 공간 그 자체가 '장소 특정적 작품'이다. 최소한의 요소로 명상적 분위기를 이끈다는 공통점에서 안도가 만드는 공간은 터렐의 빛 작업을 담기에 제격이다. 터렐의 '스카이스케이프'는 돔형의 백색 천장 한가운데 뚫린 동그란 구멍으로 보이는 빛 그 자체가 작품이다. 벽에 기대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자. 파란, 그러나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하는 그 푸른빛이 모든 것을 잊게 한다. 건축법상 스프링클러 등 소방안전 장치와 비상구 표시등 같은 것을 설치해야 했지만 작품과 그 감상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작가가 강력히 반대해 불꽃감지기 등의 대안책을 마련했다는 후문이 따른다. 터렐은 이 한 공간에 2개의 작품을 조성했는데 자연광이 들어오는 뚜껑을 닫으면 인공조명으로 천장에 둥근 빛이 맺히게 하는 '스페이스디비전'으로 작품이 바뀐다. 신발을 벗고 벽을 더듬어가며 어둠 속으로 들어가 감상하는 '웨지워크'는 감각의 허망함을 일깨운다. 벽 안에 조성된 빛의 공간으로 들어가 체험하는 '간츠펠트'는 빛에 이끌려 들어가다가 진공에 뜬 듯한 느낌과 함께 몽환적·환각적 경험을 하게 한다. 영적인 빛의 공간으로 들어가 뒤돌아서는 순간 내가 왔던 저 너머가 어둠으로 바뀌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크밸리 안에 있지만 미술관 방문만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80%에 이른다. 개관 첫해 관람객이 6만7,000여명이었고 올해 목표는 10만명이다.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을 지나 원주까지 드라이브코스를 만끽해도 좋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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