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강화보단 중기 경쟁력 키워 공정한 관계 이루는게 정책 역할
야당의 FTA 폐기론은 명분 없어… '盧대통령 후회' 주장도 어불성설
지속가능하려면 분배만으론 부족… 진보진영도 성장담론 만들어놔야
"대기업을 두들기면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규제할 부분은 해야 하지만 국가산업ㆍ부품산업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키워 공정한 관계가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역할입니다. 한쪽을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김병준(58ㆍ사진) 전 청와대 정책실장(국민대 교수)은 4ㆍ11 총선을 앞두고 서울경제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국민의 분노를 유발하고 대기업 때리기를 일삼는 최근 정치권의 행태에 강한 어조로 일침을 가했다. 김 전 실장은 "사회양극화는 기본적으로 지식정보사회로 변화하고 세계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으로 거시 차원의 원인이 있다"며 "이를 대기업 등 어느 한쪽에 양극화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쉬운 정치를 하기 위한 것"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현 정부는 물론 총선을 앞두고 대기업을 서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진보와 보수 진영 정치권 모두를 겨냥하고 있었다.
참여정부 시절 정책라인을 지휘했던 김 전 실장은 인터뷰를 통해 정치권의 대기업 때리기와 양극화 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등에 대한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특히 김 전 실장은 최근 야당의 한미 FTA 흔들기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에 미국 경기가 악화되는 것을 보고 FTA 체결을 후회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며 "서브프라임 문제는 협상 당시부터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팀이 이미 알고 있던 사안으로 야당이 주장하는 FTA 폐기론은 명분이 없다"고 밝혔다. 김 전 실장은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의 정책 분야를 이끌었던 인물로 한미 FTA도 그의 재임 중에 추진됐다.
그는 FTA에 찬성한다고 입장을 밝힌 뒤 "한미 FTA의 정확한 계산서를 뽑을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라도 열어야 한다"며 "한미 FTA로 고통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학교가 멀어도 가야 한다. 안 가면 편하겠지만 비가 와도 학교에는 가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최근 들어 야당에서도 폐지 주장에서 발을 빼는 분위기"라며 "양국이 비준한 마당에 국제사회에 떳떳하고 폐기 이후 여파를 고려할 때 폐기는 무리"라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만약에 정말 억울한 게 있다면 논리로 설명해서 FTA 이외의 부분에서 한국이 얻어내야 한다"며 "FTA는 한 부분이며 장사가 끝난 게 아닌 만큼 FTA 외에 외교ㆍ국방ㆍ비자 등 주고받을 수 있는 다른 수많은 부분으로 눈을 넓히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전 실장은 대기업 때리기 등 양극화 문제를 대하는 정치권의 태도를 그릇된 정치전략의 표본으로 지목했다. 그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거래나 대학 내 교수와 강사의 대우 차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힘의 불균형은 단순히 재원을 투입해 복지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불균형ㆍ불공정은 국가권력이 정의로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의 정의 구현 방식은 근본적인 시스템 구축이 아닌 한쪽을 때리는 잘못된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김 전 실장은 "구하기 힘든 부품은 지금도 대기업이 직접 우수 중소기업에 가서 무릎 꿇고라도 받아온다"며 "국가는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키우도록 돕고 그 과정에서 대기업이 기술 탈취를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동반성장위원회의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힘의 균형을 맞지 않은 상황에서 기준조차 모호한 초과이익을 공유하라는 것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며 "공정한 관계를 위해서는 차라리 중소기업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부동산 담보를 잡는 관행을 개선하거나 금융기관이 기업의 기술을 평가하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대기업이 양극화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수입물가 상승으로 서민경제에 시름을 안긴 고환율 정책이 수출 대기업에는 득이 됐다는 점에서 대기업의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는 수출 대기업이 잘 돌아가면 결국 그게 낙수효과로 나타날 것으로 봤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며 "이는 대기업에서 시장으로 가는 파이프라인이 고장 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다음 정권이 이를 기억해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나름의 견해를 내보였다. "파이프라인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 투자 파이프라인입니다. 대기업이 새로운 영역에 투자를 하고 새로운 직종을 창출해야 하는데 지금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잡아먹는 데 투자합니다. 둘째, 소비입니다. 대기업의 이득이 대기업 직원까지 가는 데 그칩니다. 중산층이 백화점, 외국 제품에 관심을 두면서 재래시장까지 배분기능이 닿지 않는 것입니다."
김 전 실장은 이 같은 진단과 함께 정부의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 그는 "이 문제는 변수 자체가 지식정보사회로 전환하는 등의 세계사적 변수가 있기 때문에 정권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누구든 함부로 풀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억지를 부리다가는 시장경제를 왜곡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최근의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재벌세나 출자총액제한제도ㆍ부자증세 등을 양극화 해법으로 쏟아내고 있는 것에 대해 "쉬운 정치 방법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정치를 할 때 모두가 공감하는 적을 만들면 그 정치는 성공한 것"이라며 "새로운 정치가 일어나려면 이제 여야 모두 분노의 정치를 그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탐욕스러운 1%를 비판하는 '어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street)'운동을 거론하며 분노의 정치를 비판했다. 김 전 실장은 "탐욕은 1%뿐 아니라 99%에게도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 역시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는 99%가 있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며 "문제는 국민들은 1%에 분노할 수 있지만 정치인들은 절대 그러면 안 된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정치인들이 어느 집단의 욕심 때문에 모두가 어렵다고 규정하는 순간 이는 풀 수 없는 문제가 된다"며 "적을 만들고 분노를 유발해 표를 얻으면 결국 이는 분노의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분노의 정치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공약으로 그는 재벌세를 꼽았다. 그는 "욕먹을 소리일 수 있다"고 전제한 뒤 "사실 재벌세는 상징성의 문제지 효과는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고 단언했다. 김 전 실장은 "현재 가장 세금을 안 내는 계층은 사실 중위소득자"라며 "서구의 노동비용 중 조세부담(tax wedge)은 50% 수준이지만 우리나라는 중위소득자 기준 17%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복지를 확대하고 세수를 충원하기 위해서는 사실 재벌이 아닌 중산층을 건드려야 하는데 이는 그 어느 정치인에게도 어려운 일"이라며 "이를 두고 재벌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면서 쉬운 일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출총제에 대해 "참여정부 당시 유명무실했던 출총제를 결국 없앴는데 이후 대기업들이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부정적인 여론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 전 실장은 차기 집권을 노리는 세력, 특히 진보 진영은 집권 이후에 실천할 성장담론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든 성장이든 지속 가능하려면 분배에 대한 담론만으로 부족하고 인재 공급, 과학기술, 발달된 자본시장 등 성장을 어떻게 촉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며 "개방과 서비스산업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사회적 일자리를 넘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개방과 서비스산업도 고민하고 성장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김 전 실장은 불쑥 최근 들어 노 전 대통령의 이야기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양반이 말씀하시기를 '지사는 옳아야 한다. 장군은 이겨야 한다. 그렇다면 정치는? 정치는 옳으면서 이겨야 한다'고 했다"면서 "최근 우리 정치를 보면 둘 중 뭔가 하나는 없어진 것 같다"며 요즘 정치권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 김 前실장의 사회구조 변화론 김병준 전 청와대정책실장의 현재 공식 직함 가운데 하나는 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장이다. 사회디자인연구소는 바람직한 사회구조에 대한 담론을 만들고 합리적인 시민의식을 확산하고자 하는 연구소다. 김 전 실장은 연구소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한국 권력의 특성을 역삼각형에 비유했다. 국민들의 기대는 역삼각형의 윗변처럼 넓지만 실제 권력과 정치적 기반은 아래 꼭지점처럼 적다는 설명이다. 그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게 되고 이후 여당ㆍ공무원조직이 빠져나가 결국 집권 4~5년 차가 되면 모진 바람 속에 홀로 남는다"며 "노태우ㆍ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 등도 모두 그랬고 다음 정부 역시 내용은 달라지겠지만 구도는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사회디자인연구소를 통해 지속적인 혁신을 이룰 수 있는 정책과 제도ㆍ문화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그는 "사회디자인연구소 구성원들은 보수와 진보의 구분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며 "진보적 색채를 띠다가도 일종의 이단아 같은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한진중공업을 향했던 희망버스에 대한 연구소가 비판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김 전 실장은 "당시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이를 두고 절망버스라고 비판했다"며 "경쟁력이 떨어진 기업상황도 딱하고 크레인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이도 모두 딱한 상황에서 현장에서 한쪽 편을 드는 것은 정치인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럴 시간에 정치인들은 상황을 극복하는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와 함께 일반 시민들의 토의모임을 꾸리고 있다. 김 전 실장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직접 정치를 가능하게 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며 "SNS가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하는 문화, 토론을 통해 숙의하는 문화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김 전 실장은 이 같은 활동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걸었다고 했다. 순수하게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운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이런저런 자신의 생각을 담아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라는 책을 펴냈는데 원제목은 '메시아는 없다'였다고 했다. 그래서 왜 '메시아는 없다'고 생각했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 한 명으로 국가가 바뀌기를 기대하지만 사실 대통령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을 국민들은 반복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영웅은 없으며 메시아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할 때 스스로 될 수 있습니다." ◇약력 ▦1954년 경북 고령 ▦1970년 영남대 정치학과 졸업 ▦1984년 미국 델라웨어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1998년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2002년 국민대 행정대학원 원장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정책자문단장 ▦2002 대통령인수위원회 정무분과위원회 간사 ▦2003년 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 ▦2004년 대통령 비서실 정책실장 ▦2006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부총리 ▦2006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2008년~ 공공경영연구원 이사장 ▦2011년~ 사단법인 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장 ▦2012년 국민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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