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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한국 과학에 '다크레이디'는 없다


7살의 영국 소녀 샬럿 벤저민은 지난 1월 장난감업체 레고에 "왜 남성 캐릭터만 좋은 직업을 갖느냐"는 e메일을 보냈다. 여성들은 살림하거나 미용실에 다니는 캐릭터만 있었다.

레고는 회의를 거쳐 여성 지구과학자인 엘런 쿠이즈먼이 보낸 '연구소 세트'를 신제품으로 채택했다. 고생물학자와 천문학자·화학자 등 3명의 여성 과학자 캐릭터와 소품으로 구성된 이 제품은 출시 몇 시간 만에 품절됐다.

단순한 장난감 얘기처럼 들리지만 안타깝게도 이 에피소드에는 과학계에 팽배한 오랜 관행과 고정관념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여성은 철저히 소외된 존재이자 마이너로 치부됐다. 1967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조슬린 벨 버넬은 직접 만든 전파망원경으로 새로운 신호를 발견했다. 지도교수였던 앤터니 휴이시는 버넬의 실수라고 여겼고 버넬은 학위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날 처지였다.

그러나 신호는 계속 발견됐고 나중에 별의 일생과 죽음의 증거인 '펄서'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공로로 휴이시는 197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만 정작 발견자인 버넬은 기자회견에서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성을 단순히 도구이자 부하직원으로 여기는 풍토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수많은 여성이 '인간계산기'로 동원됐지만 그 누구의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다. 1952년 킹스칼리지 연구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DNA가 이중나선구조라는 것을 보여주는 X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영광은 이 사진을 훔쳐본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에게 돌아갔다. 왓슨은 회고록에서 프랭클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깐깐하고 욕심 많은 여성"이라고 폄하했다.

흔히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로 마리 퀴리를 꼽지만 퀴리 못지않은 업적을 낸 여성 과학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플로렌스 더럼은 멘델 유전학을 생물학의 정설로 확립했고 자넷 나이븐은 쯔쯔가무시 백신을 개발했다. 로절린드 피트 리버스는 갑상샘 호르몬을 발견했다. 하지만 과학계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인색했다. 이들 여성 과학자를 과학사에서 잊혀진 존재라는 의미에서 '다크 레이디'라고 부르는 이유다.

과학계와 사회 전반에서 여성의 역할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공계 대학과 연구현장에서 여성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라 '주류'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경쟁을 펼치고 업적을 내기에는 여건이 미비한 것 또한 현실이다. 한국 연구자 중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평가받는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조차도 "임신과 출산이 연구인생 최대의 위기였다"고 회고할 정도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여성 과학자들이 임신·출산 등으로 경력이 단절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과학기술 생태계 조성에 힘쓰고 있다. 이들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직업 개발도 진행 중이고 일부는 이미 연구소나 대학으로 돌아갔다. 장기적으로는 경력단절이 아예 없는 연구현장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여성 과학자들이 과학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을 발표할 날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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