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가을. 당시 해외 배낭여행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소위 외국물을 좀 먹은 사람이거나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하고 도전의식을 가진 소수 학생들이 주로 누리던 것이었다.
어느 날, 나를 포함해 영어를 못하는 세 명이 모여 다방결의를 했다. 내용인즉슨 함께 구라파(유럽) 배낭여행에 한 번 도전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도전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영어를 잘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누구 하나 유럽에 가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기왕 마음먹었으니 한 번 해보자며 일주일에 한 번 퇴근 후 모여 각자 수집해온 정보를 공유하고 계획을 분담했다. 한 사람은 여행사에 가서 우리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시킨 후 여행지에서의 일정과 숙박·비행스케줄·기차표에 대해 연구하고 협상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를 연구하고 준비물을 구입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총 경비를 관리하며 역할분담을 했다. 비록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계획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정말 멋진 10일간의 해외 배낭여행 스케줄이었다.
영어를 못하니 일단 영어사전 한 권을 짐에 넣고 위기상황이 생기면 아는 몇 개의 영어단어에 손짓 발짓을 더해보기로 마음먹고 출국길에 올랐다. 셋이 함께 간다는 든든함 하나로 패기 있게 출발했지만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겨우겨우 수첩에 영어문장을 조합해 공항직원에게 보여주며 길을 물었다.
목적지는 개선문 근처의 숙소.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짐작으로 알아듣고 전철을 탔다. 파리 중앙역에 내려 무작정 걷거나 택시를 잡아탔고 마침내 개선문 근처에 도착한 다음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긴장 속에서 일차 관문을 통과하고 나니 왠지 이 여행을 잘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영어 까막눈 세 명은 재래시장을 구경하며 평화롭게 파리구경을 시작했다. 첫날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 펼쳐질 유럽여행에 들떠 모두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강행군이 시작됐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 단 몇 개의 단어만을 건네 답을 얻었고 안 되면 다시 앞뒤가 안 맞는 영작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도 안 되면 온몸으로 원하는 것을 표현해 목적을 달성했다. 이런 방식으로 에펠탑을 찍고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베르사유 궁전, 센강 유람선에 이르기까지 즐겁게 구경하고 몽마르트르 언덕에서는 초상화를 그려 받기도 했다. 이후 스위스·모나코·이탈리아에서도 손짓 발짓 영어로 즐겁게 여행하고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고 돌아왔다. 세 사람 다 영어를 못하니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또 겁나는 여행이었겠는가. 그래도 큰 탈 없이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혼자가 아닌 함께 걷는다는 든든함 덕분이었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인생에 있어 좌우명이 될 만한 깨달음을 두 가지나 얻고 돌아오기도 했다. 첫째, 혼자서 하면 도저히 못할 일을 셋이서 힘을 합하니 즐겁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쉽게, 휩쓸리듯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여행지에서는 각자 맡은 역할을 즐겁게 수행하며 리더십을 배울 수 있었다. 둘째, 안 된다고 지레 겁먹고 물러서지 말고 한번 도전해보라는 것이다. 비록 열흘이지만 긴장과 이완을 균형 있게 반복하며 당황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 만약 영어를 못해서, 겁이 난다고 부딪혀 보지도 않고 포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내 생애 이런 환희를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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