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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2월 9일] <1616> 뤼네빌 협약


1801년 2월9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뤼네빌 협약을 맺었다. 5개 조항으로 이뤄진 협약의 골자는 오스트리아의 굴복과 양보. 프랑스는 알프스산과 라인강 서쪽,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 북부를 세력권으로 얻고 네덜란드 통치권도 인정받았다. 자유ㆍ평등ㆍ박애를 내걸고 국왕(루이 16세)까지 처형한 프랑스혁명을 막을 목적으로 결성된 제2차 대 프랑스 동맹도 이 협약으로 영국만 남기고 깨졌다. 프랑스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와의 두 차례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체결된 뤼네빌 협약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독일통일의 촉매제로 작용한 것이다. 당시 독일 지역은 한 마디로 사분오열 상태. 신성로마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귀족들에게 행정권과 조세권을 물론 국방과 외교권까지 이양된데다 30년 종교전쟁(1618~1648년)으로 갈라질 대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뤼네빌 협약 체결 직전, 독일의 지도는 355개 영방(領邦)과 1,476개의 자율적인 제휴령으로 쪼개진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우선 라인강 서쪽의 112개 제후령을 통합(1803년)했다. 1806년 16개 영방을 한데 묶은 라인연방의 출범은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킴과 동시에 오스트리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작은 단위로 쪼개진 독일 지역을 합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던 나머지 독일 지역에서도 철학자 피히테의 시리즈 강연 '독일국민에게 고함'을 비롯한 민족자각운동이 일어나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전후처리를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도 독일통합의 움직임은 변하지 않아 독일 지역은 독립적인 39개 영방의 결합체인 독일연방이라는 새 옷을 입었다. 결국 독일은 프로이센의 주도 아래 1871년 근대 통일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패배를 민족적 자각으로 극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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