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신화' 일궈 청와대까지… 첫 노동자·CEO출신 대통령
| 현대건설 샐러리맨 시절 이명박 당선자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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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당선자가 서울 시장 시절 복원된 청계천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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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시대] 당선자가 걸어온 길
'샐러리맨의 신화' 일궈 청와대까지… 첫 노동자·CEO출신 대통령
이명박 당선자 "대국민담화" 발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19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 당선자는 개표상황실을 찾아 "정동영·이회창·문국현·이인제·권영길 후보 모두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그 분들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다"고 강조했다. / 한국아이닷컴 김동찬기자 dc007@hankooki.com
홍재원 기자 jwhong@sed.co.kr
현대건설 샐러리맨 시절 이명박 당선자의 모습
이명박 당선자가 서울시장 시절 복원한 청계천은 서울의 자랑거리이자 이 당선자의 최대 치적이 됐다. 시장 시절 이 당선자가 청계천에 발을 담근 채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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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삶은 가난과 이를 극복한 성공신화로 이어진다. 시장바닥에서 사과좌판ㆍ풀빵장수ㆍ환경미화원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집안형편이 어려웠지만 명문대 진학과 현대건설 입사, 사장까지의 초고속 승진 등 샐러리맨의 신화로 우뚝 선 자수성가의 전형이다.
또 성공한 기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서울시장과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그의 대통령 당선에는 경제회복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이 묻어 있는데 이런 열망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그는 인생역정과 행로에서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 그의 대선행보 또한 철저하게 이런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정책의 중심도 가난 극복, 즉 성장을 통한 경제회복에 맞춰졌다. 교육정책은 ‘가난의 대물림 방지’에 초점을 뒀다.
◇66년 전 오늘, 이명박의 탄생과 ‘굴껍데기 같았던’ 가난=1941년 12월19일. 일본 오사카 목장에서 일하던 이충우(포항시 북구 흥해읍 출신, 1981년 작고)씨와 대구 반야월 출신 채태원(1964년 작고)씨는 아들을 얻어 이름을 명박이라고 지었다. 가난한 노동자의 집에서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가 정확히 66년 후인 2007년 12월19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당선자는 어린시절 가난했다. 너무 어려웠던 집안형편 탓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 채씨를 도와 시장바닥으로, 길거리로 나서야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풀빵ㆍ뻥튀기를 만들어 팔았으며 어머니 생선가게에서 일해 몸에서는 생선냄새가 떠날 줄을 몰랐다. 둘째형 상득(현 국회부의장)씨가 어려서부터 수재로 인정 받아 부모는 그의 공부 뒷바라지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난한 형편 탓에 머리 좋은 형에게 가족 전체의 기대와 지원이 집중됐다.
그래도 머리 하나는 좋았던 이 당선자는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 하나를 보고 동지상고 야간부에 들어가 결국 장학금을 받게 된다.
1959년 12월 온 가족이 대학에 진학한 형 상득씨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서울로 온 뒤로는 달동네 합숙소에서 일용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부모가 이태원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놓고 노점상을 했는데 방이 너무 좁아 같이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유일한 꿈은 ‘매일 출근하고 월급 받는 월급쟁이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그는 자서전인 ‘신화는 없다’에서 “굴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도록 떨어질 줄을 몰랐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 당선자는 거리유세에서, 정견발표에서, 방송토론에서 늘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시장바닥 출신이어서 잘 안다” “내가 일용직 노동자로 일해보니….”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희망은 누구보다도 가난에 몸서리쳤던 이 당선자가 선거 기간 내내 외쳤던 꿈이었다.
가난한 노동자 아들로 태어나 시장 좌판서 궂은 일현대건설 입사후 초고속 승진…성공한 기업인으로
◇두 번의 인생역전, 고려대 입학과 현대 입사=이 당선자는 교육정책을 설명할 때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교육이 가난의 대물림을 막아줘야 합니다. 가난한 집 자식도 명문대에 진학해 성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61년 고려대 입학으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이 당선자는 당시 ‘대학시험에만 합격하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대학중퇴 학력은 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청계천 헌 책방에서 책방 주인의 선심으로 헐값에 책을 사 땟국이 흐르는 얼굴로 주경야독한 그는 마침내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 상대 학생회장까지 지냈다.
이 당선자는 선거기간에 “솔직히 내가 고려대를 나오지 않았으면 기업 입사와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겠느냐”고 ‘인생역전’의 시작이 대학 입학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이 시기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며 대학에 다녔다.
비록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고려대 재학시절은 명문대 타이틀뿐 아니라 그에게 사회 문제에 처음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는 상과대학 학생회장 시절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ㆍ3시위를 주도해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6개월간 실형을 살았다. 김덕룡,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 등 6ㆍ3세대 정치인들과의 교분은 이때 맺어졌다.
이런 경험은 정치인 이명박의 눈을 띄워준 계기였지만 학생운동 및 복역 경력은 취직에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현대건설 입사시험을 치른 그를 두고 당시 인사부장이 전력을 문제 삼아 난색을 표하는 일이 벌어졌다. 청년 이명박은 용감하게, 또는 무모하게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회진출을 막지 말라’고 편지를 썼다. 며칠 후 이낙선 청와대 비서관과 만났고 현대 입사의 길이 열렸다.
이 당선자가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이 회사는 중소기업 규모였다. 하지만 그는 입사 후 27년간 현대그룹에서 일하면서 세계적인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웠다. 특히 입사 12년 만인 1977년 35세 때 현대건설 사장 자리에 오르며 ‘샐러리맨 신화’를 쓴 그는 지금도 수많은 기업가 지망생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현대 신화와 정계입문=현대 CEO 시절 그의 영웅 스토리는 무수하다. 현대건설 중기사업소 과장으로 근무할 때 인근에 있던 골재생산 업체인 ‘공영사’가 분진방지시설을 갖추기로 약속하고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 청와대에 공급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라며 이른바 ‘청와대 빽’을 내세운 것. 다음날 아침 당시 이 과장이었던 그는 직접 불도저를 몰고 가 공영사 진입로를 깊숙이 파버렸다. 결국 공영사는 무릎을 꿇었다.
1980년대 신군부가 추진한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정책은 현대그룹에 가장 큰 위기였다. 정책의 골자는 현대ㆍ대우ㆍ아세아자동차를 하나로, 옥포조선과 현대중공업ㆍ현대양행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위세가 대단했던 국보위는 현대에 발전설비를 맡길 테니 자동차를 포기하라고 종용했다. 국보위의 압력에 밀린 정주영 회장은 회사 도장을 그에게 맡기고 전권을 넘기며 발을 뺐다. 국보위에 불려간 그는 끝까지 버텼다. 경쟁구조는 시장경제의 원리이자 원동력이라는 논리를 끝까지 꺾지 않아 글로벌 기업인 오늘날의 현대자동차가 살아 남게 됐다.
이 후보는 현대건설 이사로 승승장구하던 1970년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김윤옥씨와 결혼했다. 이날도 그의 생일인 12월19일이었다.
이 당선자의 현대 신화는 정계입문으로 이어졌다. 1992년 당시 김영삼 신한국당 대표가 전문경영인 영입 차원에서 그를 받아들여 총선에 내보낸 것. 바로 전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정치에 뛰어들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선에 나서면서 현대에서 한솥밥을 먹던 두 사람이 정치현장에서 맞서게 돼 당시 세간의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 당선자는 1995년 지방선거 때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출마했으나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쓴 잔을 마셨다. 그가 정치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1996년 15대 총선 때 정치1번지 종로구에서 이종찬ㆍ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부터다. 비록 곧바로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내놓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시련을 겪었지만 정치인 이명박은 유권자의 뇌리에 각인됐고 2002년 민선3기 서울특별시장 선거 당선으로 이어졌다.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등 대형 프로젝트 잇단 추진'일하는 경제 대통령' 부각 대한민국號 선장으로
◇청계천 신화에서 대통령 당선까지=서울시장 재임기간 이 당선자는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청계천 복원, 대중(버스)교통체계 개편 등을 잇따라 선보이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대선주자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특히 청계천은 이 당선자에게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안 되면 되게 한다’는 이 당선자의 뚝심을 대형 프로젝트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경제 하나만큼은 반드시 살려놓겠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진짜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 좀 하려고 대통령이 되려 한다’ 등 그의 선거기간 동안 한 말이 유권자들의 가슴에 파고들 수 있었던 근간이기도 하다.
굵직한 경제구상은 대선후보 때도 이어졌다. 그는 다른 대선후보들보다 빨리 한반도 대운하 구상이라는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제시하면서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는 한나라당 내 경선부터 대선 본선뿐 아니라 위기 때마다 이 당선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 됐다.
얼굴에서 땟국이 흐르던 소년 이명박,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해 월급쟁이가 돼보고 싶다던 청년 이명박이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최초의 환경미화원 출신 대통령이다. 그는 또 최초의 일용직 노동자 출신 대통령이다. 그는 최초의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요 최초의 민선단체장 출신 대통령이다. 여러 분야에서 최초를 기록한 이 당선자가 ‘대한민국호’를 경제강국ㆍ선진국으로 진입시키는 최초의 신화를 쓴 대통령으로 이어질지 국민 모두가 지켜볼 것이다.
입력시간 : 2007/12/19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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