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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앤 조이] 식권의 무한변신 "안 되는 거 빼고 다 되네"

먹고- 구내식당 메뉴 마음에 안들면 근처 맛집으로… '다양한 선택'<br>사고- 편의점·서점·마트에서도 사용 몇달치 모아 필요한 물품 구입<br>회식까지- 십시일반 모으면 큰 돈 상사 회식비 절감 '희색'




오전 8시 10분 오늘도 출근길 지하철 인파를 뚫고 무사히 회사에 도착한 직장인 이주연(29) 씨. 이른 아침부터 만원 지하철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였던 탓일까.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참았던 허기가 밀려온다. 주위를 살펴보니 자취생활 7년차인 박 과장님, 아침잠 많은 김대리님도 아침을 거른 눈치. 속이 든든해야 업무 능률도 오른다고 믿는 그녀는 재빨리 회사 근처 분식집에 전화를 걸어 김밥 세 줄을 주문한다. 잠시 뒤 배달 온 종업원에게 이 씨가 건넨 건 다름 아닌 회사 '식권'. 점심 시간에 회사 동료들과 함께 근처 부대찌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그녀는 또 회사 식권을 꺼내든다. 입가심을 위해 찾은 커피숍에서도 어김없이 결제수단은 식권. 퇴근길에 들른 회사 근처 베이커리 전문점에서 조카에게 줄 빵을 고른 후에도 이 씨의 지갑 속 식권은 다시 한번 소임을 다한다. 식권 4장 덕분에 오늘도 풍족한(?) 하루를 마친 느낌이다. 직장인들의 식권이 진화하고 있다. 그동안 회사 구내식당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식권이 최근 들어 회사 근처 맛집, 커피전문점, 빵집 등은 물론이고 서점과 편의점, 사무용품 전문점으로까지 활용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과거 사내 식당에서 한끼 점심을 때우던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식권이 이젠 직장인들의 일상 생활에 요긴하기 이를 데 없는 만능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입맛대로 골라먹는 자유이용권= "젠장, 풀밭 위의 점심이 따로 없군." 구내식당 점심메뉴를 확인한 회사원 유 모(37) 씨는 불만을 터뜨린다. 콩나물국에 미역줄기볶음, 열무된장무침, 메추리알장조림, 김치. 밥값도 아끼고 남은 식권도 소진할 겸 모처럼 구내 식당을 찾았지만 하필이면 오늘 점심이 이달의 '워스트(worst)' 식단이란다. 무방비 상태로 구내식당의 '테러'를 당하지 않기 위해선 미리 식단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깜빡했다. 그렇다고 도로 회사 밖으로 나가자니 길게 줄지어선 사람들과 아직도 서랍 속에 가득한 식권 생각에 엄두가 나지 않고 대충 한 끼 때우자니 영 입맛이 나질 않는다. 이처럼 선택의 자유는 없지만 경제적인 '식권'과 다소 값은 비싸지만 원하는 메뉴를 골라 먹을 수 있는 회사 근처 '맛집' 사이에서 갈등하는 직장인의 딜레마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되풀이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한국야쿠르트의 직원들은 식권과 맛집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구내식당용 식권과 함께 회사 근처 10개 지정식당에서 사용 가능한 외부용 식권이 함께 지급되기 때문에 야쿠르트 직원들은 취향에 따라 원하는 곳에서 회사 식권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총무팀은 주기적으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회사 주변 식당의 선호도 조사를 통해 메뉴별로 중복되지 않도록 10곳의 식당을 선정하고 회사 식권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휴를 맺고 있다. 식권 사용이 가능한 곳은 중식당, 분식집, 생선구이식당, 삼겹살식당, 샌드위치 가게 등 메뉴도 다양하다. 여의도 트윈타워에서 근무하는 LG그룹 계열사 직원들도 점심시간마다 골라먹는 재미를 누린다. 종이 식권 대신 칩이 내장된 사원증으로 매달 10만~11만원 가량의 식대를 지급하는데 사원증에 남은 금액 내에서 구내식당은 물론 지하 아케이드내 한식당, 중식당, 일식당, 레스토랑 등도 이용할 수 있다. 김민정 (31) 대리는 "구내식당의 한정된 메뉴가 질릴 때는 동료들과 함께 중식당이나 레스토랑을 찾아 별미를 맛본다"며 "여름철을 앞두고 다이어트가 필요한 요즘엔 밥 대신 샌드위치와 생과일주스로 한끼를 해결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원하는 물건 살 수 있는 제2의 상품권=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데 쓰이는 문서라는 뜻의 '식권(食卷')은 이제 사전적 의미조차 뛰어넘고 있다. 식권 사용처가 음식점 이외에 서점과 사무용품 전문점, 마트, 편의점으로 확대되면서 일종의 상품권 역할까지 하기 때문이다. 회사원 박정훈(35) 씨는 얼마 전 식권 20장으로 회사 근처의 한 사무용품전문점에서 벼르고 벼르던 9만9,000원짜리 즉석카메라를 한 대 구입했다. 회사가 직원 복지 차원에서 근처 음식점뿐 아니라 서점, 사무용품전문점과도 식권 사용 제휴를 맺은 덕분에 박씨는 식권으로 즉석카메라를 살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달 해외출장과 잦은 외근으로 거의 사용하지 못해 처치 곤란이던 식권이 오히려 요긴하게 쓰인 셈이다. 박 씨는 "보통 출장이나 휴가를 가게 되는 달에는 식권이 남게 마련인데 다양한 곳에서 식권을 쓸 수 있어 매우 합리적"이라며 "회사 동료 중에는 몇 달치 식권을 모아 30만원대 닌텐도 게임기나 초소형 넷북을 산 경우도 있다"고 귀띔한다. 그의 회사에선 식권을 알뜰하게 모아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다는 뜻의 '식권 재테크'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등 선물구입 비용이 많이 드는 5월 가정의 달에도 식권은 숨은 가치를 발휘한다. 어린이날 조카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 모(34) 씨는 식대가 입금된 사원증으로 회사 지하 편의점에서 유아용 인형을 구매했으며 어버이날을 앞두고는 직원식당 내 간이매점에서 판매하는 간이 3단 마사지 의자를 역시 사원증으로 구입,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식권으로 사내에서 판매하는 와인을 사거나 6만~7만원대 전기밥솥과 전자레인지를 구입해 집안 살림에 보탬을 주는 실속파 직장인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식권이 상품권의 기능까지 겸하면서 모 기업에서는 식권 몰아주기 게임을 통해 수 백장의 식권을 딴 직원이 인근 마트에서 100만원 상당의 골프채를 구입한 경우도 있었다. ◇부서 회식도 식권으로 OK= 화장품 회사인 '이니스프리'에서는 매월말이 되면 '식권파티'가 열린다. 각 부서나 팀별로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한 식권을 모아 사내 패스트푸드점이나 파스타 전문점에서 음식을 시켜먹으며 팀워크를 다지는 것. 말 그대로 '십시일반'으로 식권을 모으다 보니 식권을 많이 내놓는 직원은 본의 아니게 그 날의 '영웅'이 되기도 한다. 이혜진 홍보팀 과장은 "젊은 여직원들이 많은 기업 특성상 음주 회식 대신 부담 없는 사내 식권파티에 대해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여의도 LG 트윈타워에서도 퇴근 후 삼삼오오 모여 사내 레스토랑에서 사원증에 입금된 식대로 맥주를 마시는 사원들이 자주 눈에 띈다. 회식를 마치고 계산대 앞에서 현금 대신 식권을 걷는 직장인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부서 내 회식장소 섭외와 비용계산 및 결제를 도맡아 하는 강성주(32) 대리는 오늘도 오랜 고민 끝에 식권 사용이 가능한 회사 앞 숯불갈비집으로 회식 장소를 정했다. 평소 부장님이 참석하는 회식에는 통 큰 부장님이 1차부터 3차까지 쏘시기 때문에 따로 회식비 들 일이 없지만 오늘처럼 부장님이 안 계신 날엔 부서원들끼리 갹출해야 하는 만큼 식권으로 해결 가능한 회사 앞 식당이 제격이다. 물론 식권을 걷을 때도 나름의 룰이 있다. 직급에 따라 과장급은 4장, 대리급은 2장, 평사원은 1장씩 식권을 걷는다. 강 대리는 "식권으로 회식비를 계산하면 '지금 돈이 없으니 나중에 줄게'라며 회식비를 떼어먹는 일부 직원들의 양심불량 행위까지 방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식권이 현금 대용으로 쓰이면서 부작용도 생겨나고 있다. 식권이 지급되는 매월 초만 되면 지갑이 두둑해진 일부 직원들 사이에선 이른바 '식권 과소비'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내가 쏠게"를 남발하며 식권으로 동료들의 환심을 사거나 '지름신'이 강림해 평소 사고 싶은 물건을 식권으로 충동 구매하다 결국 월말이 되면 여기저기 식권을 구걸하는 베짱이 직장인들이 늘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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