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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년] <3> 아산의 못 이룬 꿈, 시베리아 개발·통일

4부. 시련은 창조의 산실









아산 정주영 소떼
지금은 이북 땅인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아산(앞줄 오른쪽)은 분단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판문점을 통과한 첫 인물이었다. 그는 서산농장에서 키운 통일 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1998년 6월16일 출발 전 평화의 집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아산은 "이번 방북이 개인의 고향 방문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 화해와 평화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진제공=현대자동차그룹










강원도 소떼 방북
아산 정주영 회장의 통일소를 실은 트럭이 판문점을 통과하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자동차그룹



경영일선 퇴진·정치 회의에 외부에서 미래 먹거리 찾아

한·소 경제협력 주력했지만 정권 미운털에 결실 못거둬

최근 '통일대박론' 맞물려 아산의 꿈, 더디지만 현실로


아산 정주영이 재방북을 준비하던 1998년 초부터 현대그룹 비서실에 비상이 걸렸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9년 전인 1989년 첫 방북 때 일본과 평양을 거치는 항공편을 이용했던 아산이 이번에는 육로로 가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 고향 땅 가는데 돌아갈 필요 있나! 판문점을 통해서 가겠다.' 북측과 대화를 적극 모색하던 김대중(DJ) 정부도 내심 환영했으나 문제는 북한. 북측이 '절대 불가'를 거듭 밝힐 때 아산 특유의 창조적 발상이 빛을 발했다. '아버지 소 판 돈 들고 집에 나선 소년이 늙어 소 떼를 몰고 고향에 가겠다'는 명분에 육로 길이 열렸다. 막힌 휴전선마저 창의력으로 넘었던 아산의 꿈은 비단 고향 방문에 머문 정도가 아니라 넓고도 컸다. 북한과 시베리아 개발을 한데 엮는다면 우리 민족에게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던 아산의 못 이룬 꿈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다.

아산이 처음 방북했던 1989년은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찾아왔던 무렵. 첫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2년째로 보다 큰 그림을 그리려 애썼다. 두 번째로 정치에 대한 의문이 깊어졌다고 전해진다. 아산은 신군부의 전횡을 나름대로 막아왔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장으로 재임하던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신군부 실세 그룹에서는 "공수부대를 동원해 현대그룹을 싹 쓸어버리겠다"고 위협한 적도 있고 전경련 회장직 사퇴 압력을 받기도 했다. 5공 출범 초기에는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을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강탈당한 적도 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5공 초기 서슬 퍼렇던 신군부에 적지 않게 맞서 막무가내식 일방통행을 막아왔다고 자부하던 터에 1988년 열린 5공 청문회는 인간 정주영에게 정치에 대한 회의를 안겨줬고 이런 감정은 훗날 정치판에 직접 뛰어드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아산은 국내 정치에 실망할수록 바깥의 일을 찾았다. 말로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사실상 인사나 주요 결정을 챙기던 아산은 신프로젝트에는 그룹의 핵심 역량을 쏟아부었다. 요즘 용어로는 오너가 직접 미래 먹거리 창출에 나선 셈이다.

아산이 주목한 미래 사업은 한·소 경제협력. 국토 전체가 목재와 석유, 석탄에서 바다의 생선까지 무한한 자원의 보물창고인 소련과 경제 교류를 트면 소련의 영향력으로 남북 통일도 앞당길 수 있다는 게 아산의 심중 계산이었다. 국교도 수립되지 않는 소련을 첫 방문(1989년 1월)한 아산은 시베리아 개발 타당성에서 자금 동원과 보증 수단까지 논의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소경제협력위원회도 이때 만들어졌다. 소련 방문 10여일 후 방문한 북한에서 아산이 맺은 계약이 '금강산 관광 및 시베리아 공동개발 등에 관한 의정서'라는 점은 아산의 마지막 큰 그림이 어느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산의 꿈은 한국과 소련 간 수교도 앞당겼다. 1990년 6월 소련을 방문해 시베리아 개발 계획은 논의한 지 100일 만에 한국과 소련의 외무당국은 수교를 발표했다. 수교 직후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아산은 "북한이 어려우니 좀 더 자유롭고 평화롭게 번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고르비는 "소련과 한국이 함께 밥을 지어 북한과 셈이 한솥밥을 나누어 먹는 날이 올 것"이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소련과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북한을 개방시키는 게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믿었던 아산의 기대는 지금까지도 기대로 머물고 있다. 무엇보다 사업 초기 추동력이 떨어졌다. 1992년 대선 출마를 위한 국민당 창당으로 정권에 미운털이 박히고 대선 패배 이후에는 보복성 세무조사와 수사에 시달렸다. 현대가 주도한 사업은 줄줄이 막히는 통에 소련 측에 공수표가 돼버린 사업도 없지 않았다. 더욱이 소련의 국체가 러시아로 바뀌면서 시베리아 개발에 대한 현지의 시각도 달라졌다.

아산은 압박 속에서도 시베리아에 대한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대로 활용만 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소련이 외상으로 선박 20척(11억5,000만달러어치)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아산은 주저 없이 응했다. 소련이 보유한 화물과 자원으로 현금을 만들어 받고 바로 건조계약을 맺었다. 창의적 사고가 빛을 발해 어디서도 신형 선박을 구할 수 없었던 소련은 배를 구하고 현대는 신용을 얻었다.

아산 정주영이 남긴 꿈은 시베리아에, 북한에 그대로 남아 있다. 시베리아의 일부인 야쿠츠크에 매장된 천연가스만 해도 중국을 제외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100년을 써도 남을 만큼 풍부하다. 날이 갈수록 가격이 비싸지만 원목도 무궁무진하다. 삼림을 벌채해 원목을 국내에 들여오면 운반 기간이 일주일이면 족하다. 캐나다와 미국, 브라질, 남미 등지에서 원자재를 실어오는 데 소요되는 20~30일보다 훨씬 짧은 만큼 경쟁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삼림 자재뿐 아니라 대부분의 원자재가 마찬가지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아산의 꿈이 더디기는 해도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도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한 '통일 대박론', 즉 남북한이 통일되면 경제적으로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전망은 짐 로저스 같은 세계적 투자자들로 하여금 "한국이 통일되면 내 전재산을 쏟아부어 투자하겠다. 그만큼 전망이 밝다"는 반응을 야기할 만큼 현실로 찾아오는 분위기다. 통일은 이뿐 아니라 투자기회를 찾지 못하던 국내 기업의 투자 및 고용 확충, 상대적으로 젊은 새로운 인구 유입에 따른 고령사회 진행 속도 완화 등의 예상하지 않았던 편익까지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통일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을지를 예견했던 것인지 생전의 아산은 "통일이 되면 두만강 이북 시베리아에 개발해놓은 자원들이 우리 경제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문제는 시베리아에도 북한에도 이뤄놓은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아산은 시베리아 개발에 일본보다 늦게 착수할 경우 우리에게 돌아올 자원이 극히 적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최근에는 아산이 맡으려 했던 시베리아 개발을 중국 자본이 가져가는 형국이다. '아산의 이루지 못한 꿈'이 '한국의 회한'이 될지, '기필코 이뤄진 꿈'이 될지 기로를 맞고 있다. /권홍우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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