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작업 속도내기 앞서 큰틀부터 세밀하게 그려야
산업 사이클·기업 기술력 등 명확한 잣대 필요
총선 이후 본격 시동 걸어야 성공 가능성 높아져
구조조정 과실 다음 정권 챙긴다는 걱정도 버려야
기업 구조조정이 우리에게 낯선 경험은 아니다. 멀리는 지난 1980년대 산업합리화 정책을 통해 문제산업을 정리했고 가까이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아 30대 재벌을 두고 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빅딜 판을 벌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는 구조조정 깃발을 들었다가 무안하게 내려놓은 경험도 있다. 당시 직접 구조조정작업에 몸담았던 경험자들로부터 구조조정 방향타를 못 잡고 흔들리는 현 정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을 짚어봤다.
"기업 구조조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다. 제 생각에는 박근혜 대통령부터 기업 구조조정작업의 과실이 다음 정권에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큰 틀을 마련하고 핵심기업 두세 곳만 짚어내면 역사는 박근혜 정부의 업적으로 기억할 겁니다. 조바심을 버려야 합니다."
김병주(사진) 서강대 명예교수는 3일 서울경제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기업 구조조정 실무작업에 돌입하면 속도를 내야 하지만 먼저 큰 그림을 세밀하게 짜는 게 순서"라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09년 구조조정 집도의로 불리는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장을 맡았지만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하고 1년 만에 자리를 떠났다. 그는 "당시 분위기는 '2010년에 주요20개국(G20) 회의 열린다' '중간에 선거도 있으니 시끄럽게 하지 말라' '천천히 하라'였다"며 "어떻게 시끄럽게 안 하고 천천히 뭘 하나. 이 정부는 구조조정에 뜻이 없구나 하고 빠져나왔다"고 회고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본격적으로 기업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한 것은 분명 옳은 결정"이라고 평가하면서 현 정부의 구조조정에 대해 운을 뗐다. 혹자는 '은행들은 비 올 때 우산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어떤 비가 오는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지금은 우산을 빼앗아야 할 시기"라고 단언했다.
김 교수는 "지금 우리 경제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단행된 구조조정의 약발이 떨어져가고 있는데다 글로벌 경기마저 우호적이지 않은 위기상황"이라며 "한마디로 잠시 지나가는 소낙비가 아닌 폭우가 지속되는 장맛비 속에 있는 셈"이라고 비유했다. 우산 속에서도 젖을 수밖에 없는 기업들은 더 큰 우산을 안겨줘도 비를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더 큰 우산을 주기 위해 자원을 낭비하기보다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게 우리나라 경제 전체로 볼 때 바람직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경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며 "사람의 몸도 죽은 세포가 떨어져나가고 새로운 세포가 생기듯이 경제가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기업이 자연스럽게 명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구조조정 여건은 외환위기 때보다 복잡하다. 당시가 국가 운명이 달린 절체절명의 시기였다면 지금의 위기는 그만큼 요란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칼날을 들이대기도 부담스러울뿐더러 내년 4월 총선이라는 정치적인 이슈도 있다. 그는 "우선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산업 차원에서 비즈니스 사이클을 포함한 경기전망, 더불어 개별 기업의 기술력에 대한 명확한 판단에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정치·사회적 문제도 성공을 위한 필수 고려 요소"라며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실업을 고려하면 총선은 큰 장애물이다. 먼저 밑그림을 세밀하게 그린 후 본격적인 작업은 총선 이후에 돌입해야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번 정권 내에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조바심도 떨쳐야 한다. 김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외환위기를 극복해낸 것"이라며 "마찬가지로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과실을 다음 정부가 누리더라도 역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본격적인 구조조정작업에 들어가면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적 관점에서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기업도 방치하면 결국 법정관리로 가고 세월아 네월아 하는 새 그나마 있던 기업 가치도 다 떨어진다"며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을 상시화하는 것은 물론 더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민규기자 cmk25@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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