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셰일업체들이 주도하던 석유전쟁에 러시아와 이란마저 가세했다. 산유국들이 상대방의 굴복만을 강요하는 전방위 '치킨게임'을 벌이면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20달러대까지 추락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또 글로벌 경제가 회복되더라도 공급과잉 여파로 유가 대세 하락기가 고착화하면서 앞으로 10년 내에는 60달러대 유가를 보기 힘들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OPEC, 감산 합의는커녕 쿼터도 못 정해=지난 4일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총회는 중동 내 양대 맹주이자 앙숙인 사우디와 이란 간의 불화만 확인한 채 끝났다. 이들은 시장 점유율 유지를 위해 현행 OPEC의 원유 생산량을 유지하기로 했다. 베네수엘라·앙골라 등 일부 회원국의 반발이나 저유가로 인한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미 셰일업체들이 고사할 때까지 버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란은 그동안 서방의 경제제재로 석유 수출길이 막혔던 만큼 다른 회원국은 감산하고 자국만은 증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OPEC은 최근 수년래 처음으로 회원국의 생산량 쿼터마저 정하지 못했다. 이미 12개 OPEC 회원국들은 하루 생산량을 3,000만배럴로 합의해놓고도 3,150만배럴을 생산하고 있다.
OPEC 의장인 엠마뉴엘 이베 카치큐 나이지리아 석유장관은 "다음 회의가 열리는 내년 6월까지 현행 생산량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해 할당량에 개의치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사우디 등도 할당량을 초과하는 생산량을 유지할 방침이다. 특히 이란은 지난 10월 현재 290만배럴인 하루 생산량을 내년 6월까지 60만배럴 더 늘릴 것으로 모건스탠리는 전망했다. 현재 원유 공급량이 수요보다 하루 200만배럴이나 더 많은데도 추가 물량까지 쏟아진다는 얘기다.
OPEC 회원국이 아닌 러시아도 저유가로 인한 재정수입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생산량을 늘리는 추세다. 미 셰일업체도 석유전쟁에서 패배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9월 미국의 원유생산량은 하루 930만배럴로 4월보다는 3% 줄었지만 5년 전과 비교하면 70%나 증가했다. 더구나 노르웨이 에너지 컨설팅사인 리스타드에너지는 내년 미국의 생산량이 기술개발과 생산원가 절감을 통해 올해 평균치보다 20만배럴 더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배럴당 유가 20달러대로 추락하나=7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37.65달러로 지난해 6월 107달러에서 18개월 만에 거의 3분의1로 줄었다. 이 때문에 시장은 내년에는 유가가 반등할 것으로 기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일 월가 대형 은행 11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내년 평균 WTI 가격 전망치는 배럴당 53달러, 브렌트유는 57달러였다.
하지만 OPEC발 충격에 추가 하락 전망이 늘고 있다. 컨설팅 업체인 캡록리스크매니지먼트의 크리스 자르비스는 "WTI 가격이 조만간 배럴당 32달러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연준의 연내 기준금리 인상으로 인한 달러 강세와 올겨울 예년보다 따뜻한 날씨도 유가하락 요인이다. FT에 따르면 이날 헤지펀드들이 유가하락에 베팅한 파생상품 계약 규모는 거의 3억6,000만배럴에 이른다.
심지어 30달러선 붕괴 경고도 속출하고 있다. 워런 길먼 CEF홀딩스 회장은 "사우디가 재정악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OPEC이 경쟁자들을 고사시키기 위해 앞으로 18개월은 더 산유량을 유지할 것"이라며 "내년에 WTI 가격이 20달러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9월 골드만삭스도 OPEC이 감산을 거부할 경우 유가가 내년에 20달러에 근접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나아가 공급과잉 지속에 유가하락 국면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이날 미 원유 시장에서 오는 2024년 말 인도분 WTI 선물 가격은 60달러선 이하로 떨어졌다. 투자가들이 앞으로 10년 뒤에도 국제유가가 50달러선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는 뜻이다. 2017년 말 인도분 가격은 50달러에 불과했다. /뉴욕=최형욱특파원 choihu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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