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겪는 신체적 학대, 성적 학대에 대해 많은 사람이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동안 신문·방송·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수많은 사건이 전파됐고 이를 통해 사회적 각성이 지속적으로 촉구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으로 확인되는 신체적 확대와 달리 정서적 학대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정서적 학대도 신체적 학대처럼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계속 남아 성인이 돼서까지 삶에 영향을 미친다. 정서적 학대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예컨대 부모가 아이의 외모나 행동을 조롱하거나, 이유 없이 잘못을 뒤집어씌우거나, 싸움이나 신경질 등으로 가정 내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틈만 나면 다른 가족 구성원을 욕하거나, 아이를 위한다는 구실로 강한 압박과 통제를 하거나, 또는 아이에게 적절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방임 등이 모두 정서적 학대다.
건강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자신감, 타인에 대한 신뢰, 일상의 즐거움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반면 정서적 학대를 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수치심, 타인에 대한 불신, 끝없는 불안감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정서적 학대를 받는 순간에도 아이는 그게 학대인지 모른다. 학대라는 말을 모를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가정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자신이 처한 환경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올바른 정서적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관계를 맺는 사람이 부모이며 결국 아이는 부모를 통해 타인의 존재를 각인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정서적 학대에 따른 자존감 결여와 미숙한 대인관계가 사회적 목표를 설정하고 추진하는 데도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정서적 학대를 받은 아이에 관한 서글픈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데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다. 아동학대 전문가 낸시 벤벵가는 학대받은 아이가 학대받는 어른이 되거나 또는 학대하는 어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정서적 학대를 받고 자란 사람은 일차적으로 부모나 형제자매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어렵다. 부모는 공포의 대상이거나 불신의 대상이고 그런 가정환경에서 같이 자란 형제자매와도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정서적 학대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가정에서는 서로 살아남기 바쁘기에 학대받는 형제를 외면하거나 부모에게 동조해 같이 학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형제자매는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성장한 아이는 성인이 돼 배우자를 만나서도 올바른 정서적 관계를 맺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배우자가 힘들 때 기운을 북돋아주기보다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부모 같은 배우자를 만나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살아가기 쉽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자녀에게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서적 학대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자녀를 낳았을 때 자신의 자녀와 올바른 정서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할 수 있겠는가. 결국 자신의 삶을 자녀에게도 그대로 전파하게 된다.
정서적 학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정량적인 측정이 불가능하다. 같은 부모 밑에서 컸더라도 모든 자녀에게서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서적 학대를 당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아이가 있다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는 한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개인이 평생 겪을 고통과 그의 사회성 결여로 사회가 치러야 할 암묵적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류한석 기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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