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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이태현 용인대 교수

"씨름 인기 부활 넘어<BR>씨름 세계화 꿈꿉니다"

이태현 교수는 “씨름 발전을 위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씨름은 우리 고유의 전통 민속 스포츠다. 잘 다져진 건장한 체구의 사나이들이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모래판에서 자웅을 겨루는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미가 있다. 이태현 용인대학교 격기지도학과 교수는 과거 ‘씨름판의 황태자’로 불렸던 천하장사 출신 지도자다. 요즘 후학 양성과 함께 씨름의 인기 부활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지난 5월12일 오전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용인대학교 종합체육관 씨름장. 와이셔츠에 양복 바지 차림의 이태현 교수가 빨간 샅바를 허벅지에 메고 모래판에 섰다. 196cm의 키에 140kg에 달하는 체중. 거구의 그가 당당한 포즈를 취하고 있노라니 저절로 현역 시절의 ‘천하장사 이태현’이 오버랩됐다. 당장 경기에 나서도 젊은 선수 몇 명쯤은 가볍게 넘어뜨릴 ‘포스’가 강하게 풍겨 나왔다. “현역 선수로 뛰어도 되겠다”며 말을 건네자, 그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이태현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샅바를 잡았다. 소년 이태현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큰 덩치에다 힘과 민첩성도 남달랐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우승을 맛본 후 3학년 시절 무려 7관왕에 오르면서 고등부 최고의 씨름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1994년 고교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청구 청룡씨름단’에 입단하면서 프로씨름에 발을 들였다. 프로의 높은 장벽을 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프로 입문 첫해 추석에 열린 천하장사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약관 20세였다.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 동시에 가장 큰 희열을 안겨줬던 승부가 바로 그 대회 결승전이라고 한다. 상대는 당시 ‘천재 씨름꾼’으로 불렸던 1년 후배 백승일 선수였다. 이날 두 선수의 결승전은 국내 프로씨름 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태현 교수는 말한다. “1994년 추석에 부산서 열린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 상대가 백승일 선수였어요. 같은 팀 소속이었던 그는 제가 봐도 타고난 씨름꾼이었죠. 우리 둘은 그날 모래판에서 무려 1시간30분간 승부를 겨뤘어요. 당시로서는 1983년 프로씨름 출범 후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된 시합이었죠.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어렵사리 따낸 승리라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그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승부는 2010년 추석에 열린 장사씨름 대회죠. 현역 선수로 마지막 우승을 거둔 대회였거든요.”

이태현 교수는 현역 시절 ‘들배지기’와 ‘밭다리걸기’를 주무기로 삼아 공격적 승부를 펼치며 통산 40회의 우승을 거뒀다.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20회의 빛나는 성적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특히 백두장사 20회는 ‘모래판의 황제’로 불렸던 이만기의 기록(18회)을 넘어선 백두장사 최다 우승의 대기록이다. 이뿐 아니라 최다 연승, 최다 승수, 최다 상금 등의 기록도 이태현 교수의 전리품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태현 교수는 갓 스무 살에 씨름판을 제패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자만심에 빠질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겸손했다. 한편으로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다. 그래서 재수를 한 끝에 이듬해 용인대에 입학했다.

용인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무도인(武道人)들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등 국위를 선양한 체육계 선배들이 강단에 선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에 한 가지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언젠가 지도자가 되어 강단에 서는 것을 목표로 세운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프로씨름 선수이자 학생으로서 ‘이중생활(?)’을 부지런히 해나갔다. 1999년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2001년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2006년에는 마침내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이태현 교수가 용인대 종합체육관 씨름장에서 포즈를 잡았다.


그는 대학생 시절 꿈꿨던 목표를 2011년 기어코 달성했다. 그 해 모교인 용인대에 교수로 부임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용인대 씨름부 감독도 겸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지도자로서 성과를 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지난해 8월 용인대 씨름부는 전국 시도대항 씨름대회 대학부 단체전 결승전에서 우승의 축배를 들었다. 10년 만의 대학부 단체전 우승이었다. 물론 이태현 교수에게는 용인대 씨름부 감독 취임 후 첫 번째 우승의 쾌거였다.

이 교수는 그날의 감흥이 떠올랐는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때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엄청 울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주고 배려해준 학교와 열심히 땀 흘리며 노력해준 선수들 덕분에 우승을 일굴 수 있었죠. 용인대는 국내 유일의 씨름학과(격기지도학과 씨름 전공)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선수와 지도자를 양성해 국내 씨름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죠. 용인대가 배출한 동문들은 현재 각계각층에서 대한민국 씨름 발전의 초석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태현 교수는 통합씨름협회 이사, KBS 씨름해설위원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그가 가장 무게를 두는 일은 뭐니뭐니해도 씨름의 인기 부활과 활성화다. 나아가 그는 ‘씨름의 세계화’를 꿈꾸고 있다. 세계인들이 씨름을 즐기는 시대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 씨름인들은 통합씨름협회를 중심으로 씨름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 교수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등재 신청서는 이미 제출된 상태다. 만약 씨름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한다면 씨름 세계화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태현 교수는 말한다. “저는 요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씨름 강습을 다니는 일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씨름의 인기가 시들해진 이유 중 하나가 젊은 층을 만족시키지 못한 점이라고 봅니다. 저는 씨름 인기 부활을 위해서는 멀리 내다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씨름을 전파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들이 지금부터 씨름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 자연스레 씨름팬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씨름은 지금의 저를 만들어줬습니다. 이제 제가 씨름을 위해 뛰어야죠. 제가 씨름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힘 닿는 데까지 할 겁니다.”

이 교수와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연구실 한쪽에 놓인 골프백과 골프클럽들이 눈에 띄었다. 문득 보통 사람의 두 배쯤 되는 거구의 이 교수가 드라이버 샷을 날리면 비거리가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골프는 재활운동으로 시작했어요. 씨름은 오른쪽 상체와 하체를 많이 쓰는 운동입니다. 반면 골프는 (오른손잡이 기준) 스윙 궤적상 왼쪽 신체가 중심이 되죠. 그래서 신체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골프채를 잡게 됐어요. 아직 실력은 초보자 수준입니다(웃음). 하지만 지난해 골프채를 바꾸고 레슨을 받으면서 실력이 늘기 시작했어요. 제 전공은 씨름이지만, 골프도 상당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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