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조선업계의 수주절벽이 심각한 상황에서 중국이 출혈수주로 한국 조선소의 목을 죄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수익성 악화로 자국 내 주요 조선소마저 무너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가수주를 감행해 한국 조선업계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치킨게임을 본격화하는 것이다. 중국 내 금융기관까지 나서 이들의 출혈수주를 부채질하고 있지만 한국은 국제 규정에 묶여 속절없이 바라만보고 있다. 중국 조선소들은 정부와 자국 금융권을 등에 업고 건조비용의 100% 가까이를 선박금융으로 조달하면서 수주계약을 수월하게 따내고 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체결한 ‘선박금융지원 양해각서(SSU)’ 때문에 금융기관이 선박 건조비용의 80% 이상을 대출할 수 없도록 묶여 있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SSU를 위반할 경우 강력한 제재를 받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위반할 수는 없어 답답한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이런 상황은 글로벌 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 독일계 해운사인 노르딕함부르크는 이달 초 1,400TEU(표준화물선 환산톤수)급 컨테이너선 6척을 중국 광저우의 웬청 조선소에 신규 발주하기로 했다. 조선업계는 새로 발주한 선박들이 일반적인 선박유 대신 친환경 액화천연가스(LNG)를 연료로 하는 첨단 컨테이너선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웬청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제시해 한국 기업을 제치고 첨단 선박을 수주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최근 저가수주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프랑스의 거대 해운사 CMA CGM 역시 3,000TEU급 컨테이너선 4척의 발주계약을 이달 초 중국 조선소 코스코와 맺었다. 일부 국제 선박 브로커들은 “CMA CGM이 배 한 척당 가격을 2,900만달러(약 337억원)로 책정했다. 국제시세보다 훨씬 싼 값”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최근 중국 조선소들의 경영상태는 저가수주 공세를 펼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양판그룹의 조선소 2곳(저우샨·칭다오)이 이달 초 지방정부에 자금지원을 신청했다. 중국 내에 상장한 8개 조선소 가운데 매출 기준 4위인 국영 세인티마린조선소는 지난 2월 난징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1월에는 국영 저장해운그룹 산하 저우샨우저우선박수리건조회사가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등 중국 조선소는 장기간 지속돼온 침체를 견디지 못해 국유·민간 가릴 것 없이 줄줄이 쓰러지는 상황이다.
조선전문 매체 시트레이드매리타임은 지난해 폐업한 중국 중대형 조선소만도 20곳이 넘는다고 집계했다. 중국 조선업계에서는 오는 2020년까지 현재 몇백 개인지 추산도 어려운 자국 조선소가 한자릿수로 줄어 옥석이 가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국영조선소였다가 현재는 중국 최대 민영조선소로 탈바꿈한 양즈장조선의 렌 위안린 회장은 지난달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정부가 기획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제13차 5개년계획에 따라 2020년이면 조선소가 10개만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외 조선업 종사자들은 2010년 3,000개를 넘었던 중국 조선소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100~300곳 정도만 정상 조업하고 있다고 추산한다. 국내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내 조선소의 경영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파산과 구조조정이 매일 일어나는 상황인 것만은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중국 조선업체들은 아테네에서 만난 한국 조선업체 임원이 말한 “멈추면 쓰러지는 외발자전거”처럼 저가 출혈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막대한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행위를 지속하는 것은 우선 호황기에 불려놓은 인력·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다. 2013년 중국의 선박수주 물량은 1,419척, 총 466억달러 규모에 달했지만 지난해는 516척, 221억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중국 정부와 조선업계가 진행하는 구조조정 속도보다도 훨씬 가파르게 수주가 감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금융기관들은 자국 조선소들의 출혈수주를 더욱 부추기면서 해외 경쟁사들의 생존까지 위협하고 있다. 현재 선사들은 해운업 침체로 선박 건조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신규 발주를 꺼리는 처지다. 국내 조선업계는 신규 수주 한 척이 절실한 상황에서 금융지원이라는 우군까지 없다면 중국과의 수주전에서 패배하는 것은 물론 고사(枯死)가 불 보듯 뻔하다고 우려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일본 조선업체들은 심각한 수주가뭄을 이기기 위해 자국 선사들에 대한 수주 의존도를 올 들어 90%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한국은 자국 물량 의존도가 10% 남짓에 불과해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다.
일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는 중국 조선업계의 움직임에 조금이라도 대응하고자 일종의 꼼수까지 동원한다는 소문도 돈다. 예를 들면 조선소를 지원하는 A은행이 선박 건조비용의 80%를 제하고 남은 20%를 선주 대신 선주사와 거래하는 B은행에 대출하고 B은행은 다시 선주에 이 돈을 대출해 사실상 선박 건조비용의 100%를 빌려준다는 얘기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직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적은 없지만 한국에서 이런 일은 절대 없었다”며 “이러한 편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과 불리한 싸움을 벌이는 조선업체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금융지원 대책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 조선업계의 출혈수주는 특히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치킨게임으로 미래 조선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깔렸다는 점에서 우리 조선업체들에 엄청난 위협요인이다. 치킨게임에서 살아남는 조선소가 전 세계 경쟁사, 특히 한국의 빅3(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를 몰아내고 고부가선박 시장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6~10일(현지시간)까지 열리는 ‘국제 조선·해운박람회(포시도니아) 2016’에서 중국 조선소들은 대규모 해양플랜트와 다양한 LNG선 모델을 선보이며 고부가선박 시장 공략 의지를 드러냈다. 국내 조선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중국이 LNG선 같은 고부가선박 계약을 속속 따내는 것을 보면 해외 선주들도 중국의 첨단 건조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아테네=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