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한쪽 벽에 뮤지컬 포스터 액자 5개가 나란히 내걸렸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채플린, 할러 이프 야 히어 미, 로키, 닥터지바고….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이들 작품은 신춘수(48·사진) 오디컴퍼니 대표가 현지에서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공연의 메카에 우뚝 선 한국인 프로듀서’라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흥행 면에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픔과 아쉬움이 담긴 이들 작품은 그러나 신 대표에게는 소중한 자산이자 노력의 기록이다. “누군가는 외화 낭비라고도 했고 국내 무대에 올릴 작품이나 잘 만들라고 했죠. 해외 진출은 그러나 제 개인의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 한정된 국내에서 더 나아가 기회를 모색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계속 시도할 거고 이제 뭔가 거둬들일 때가 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 하는 일로 만드는 공연계의 돈키호테 신 대표를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브로드웨이를 꿈꾸다=막연한 꿈이었다. 공연을 만드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 같은 ‘큰물’을 동경하는 법. 공연 제작자 신춘수의 도전도 다를 것은 없었다. 2009년 뮤지컬 드림걸즈의 한미 합작을 계기로 세계 무대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오페라의 유령, 캣츠,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 같은 뮤지컬을 제작한 캐머런 매킨토시처럼 모든 나라에서 좋아할 법한 뮤지컬을 만들고 싶었다. 회사 운영 햇수가 쌓이면서 해외시장에 대한 고민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신 대표는 “한국 뮤지컬 시장은 한정된 시장에서 다수의 작품이 경쟁하는 척박한 환경”이라며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고 오리지널 제작사로서 로열티와 수익을 내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해보지 않고 그림만 그리면 될 일이 없습니다.” 넘어지고 깨져도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오뚝이 같은 브로드웨이 도전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넘어지고 깨져도 도전=굳이 외국 나가 설움 받고 ‘미국 병에 걸렸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지킬앤하이드·맨오브라만차·드림걸즈·드라큘라…. 오디컴퍼니의 대표 라인업은 매 시즌 매진을 불러오는 대표 흥행작들이다. 특히 지킬앤하이드·맨오브라만차는 10년 넘게 인기 공연 자리를 지킬 만큼 마니아층이 두텁다. 대박은 아니더라도 안전하게 회사를 꾸려가며 작품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해외 프로젝트가 오디컴퍼니 재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니 ‘대표의 욕심에 회사가 기울었다’는 지적이 안 나올 수 없었다. “지난해에 닥터지바고 공연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회사가 많이 어려워졌더군요. 제 몸과 마음도 상처투성이였고요. 이후 국내 공연들이 잇따라 흥행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잘 이겨냈지만, 해외 진출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어요. 다만 이전보다는 좀 더 점진적으로 작업하겠죠.(웃음)” 신 대표는 이미 미국에서 영화 ‘과속스캔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스핀’과 암에 걸린 여자 몸속의 적혈구와 백혈구를 로봇으로 형상화한 ‘요시미 배틀스 더 핑크 로보츠’의 워크숍·트라이아웃 공연을 마친 상태다. 요시미의 경우 중국·마카오·싱가포르 등 중화권 시장을 통한 작품 개발 후 브로드웨이로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저 높은 곳의 별을 따기 위해 깨지고 부러지길 자처한 남자. 막연한 꿈이었던 브로드웨이는 그에게 척박한 현실을 보여줬고 이제는 확실한 계획과 목표가 됐다. “많은 경험을 통해 ‘이렇게 하면 된다’ 하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자신도 생겼고요. 이제 슬슬 뿌린 것을 거둬들일 때가 왔다고 봅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하고 싶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하는 성격이다. 스스로 “전날 밤에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을 다음 날 아침에 해소하지 못하면 죽을 맛”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다. 신 대표가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은 영화감독이다. 칸 영화제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고1 때 독일어 교생 선생님과 리처드 기어 주연의 영화 ‘브레드리스’를 봤어요. 어두운 극장, 그 앞에 펼쳐지는 이야기, 모든 게 좋았죠. 그때 막연하게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군 제대 후 곽재용 감독의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 박찬욱 감독(당시 조감독)의 후임으로 투입되며 영화와 연을 맺었고 밤낮 구분 없이 ‘피폐하게’ 20대를 영화판에서 보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자학하며 지내던 어느 날 ‘공연 일 한 번 해보라’는 지인의 제안을 받았다. 설도윤 현 설앤컴퍼니 대표가 진행하던 창작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초연 작업이었다. 잠깐의 외도처럼 ‘일해보러 간’ 그곳에서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영화관처럼 어두워지면서 이야기가 펼쳐지고 사람들이 그 안에 빠져드는 모습이 좋았어요. 일하면서 프로듀서라는 일에 관심도 많아지고 어느덧 목표가 칸이 아닌 브로드웨이로 옮겨가 있더군요.” ‘내 색깔로 내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서른을 갓 넘겨 독립했다. 그렇게 만든 회사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Open the Door)는 뜻의 ‘오디(OD)뮤지컬컴퍼니’다. 오디의 성장 발판이 돼준 대표작으로는 지킬앤하이드와 맨오브라만차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흥행 효자’이지만 각각 2004년, 2005년 초연 때만 해도 주위에서는 ‘그게 되겠느냐’고 뜯어말렸다. 류정한·조승우라는 당시로써는 스타가 아닌 ‘가능성 보이는’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새 이야기에 새 배우를 넣어 새 물결을 만들고 싶다”던 그의 바람처럼 두 작품은 10년 넘게 사랑받는 장수 스테디셀러로, 그리고 류정한·조승우는 국내 뮤지컬을 대표하는 스타 배우로 성장했다.
◇영화·음악 등 영역 확장=신 대표는 지난해 회사 간판을 ‘오디뮤지컬컴퍼니’에서 ‘오디컴퍼니’로 바꿔 달았다. 뮤지컬에서 더 나아가 영화·음악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사업 영역을 넓히겠다는 이유에서다. 신 대표는 “회사가 영속성을 지니고 신춘수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이 계속 운영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음악 영화나 뮤지컬 영화처럼 오디가 잘할 수 있는 일과 연관된 다양한 작업을 만들어갈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 2011년 직접 시나리오·연출을 맡고 출연까지 한 영화 ‘멋진 인생’으로 영화감독협회에 당당히 등록된 신 대표는 ‘비긴 어게인’ 같은 음악 영화를 한창 구상하고 있다. 새로 만든 음악과 기존에 알려진 노래 등을 엮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그는 12월까지는 작업을 끝마칠 계획이다.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할수록 상처도 쌓였다. 배우와 스태프, 관객까지.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그들로부터 ‘평가받는’ 자리에서 부담과 중압감은 늘 그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고 후회한 적 없는 일이 뮤지컬이다. “뮤지컬 속에서 저는 늘 환상적인 여행을 하고 있어요. 설레게 하고 흥분하게 만들고 감동까지 주는 무대라는 곳은 저에게 마법 그 자체입니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songthoma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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