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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3억 5,000만 파운드의 魔性

이상훈 경제부 차장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가 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튜브에서 미국의 토크쇼 프로그램(라스트 위크 투나이트)을 우연히 봤다.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 존 올리버는 브렉시트를 이렇게 비유했다. “공중에 떠 있는 아이스크림을 잡기 위해 몸을 날려 기어이 이를 손에 넣었지만 지나가는 차에 치여버린 선택”으로 말이다.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영국의 선택이 이런 조롱을 감수해야 할 만큼 어리석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부분이 적지 않다. 이번 사태는 ‘권력에만 관심 있는 무책임한 정치인과 그들에게 놀아난 국민의 합작’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난민 유입을 비롯해 회원국 간 경제력 격차, 부의 불균형에 따른 불만 확대 등 직면한 문제에 무기력했던 유럽연합(EU) 자체의 결함에 주목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정작 기자가 되짚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브렉시트라는 블랙스완을 현실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탈퇴파의 유세 버스다. 이 버스에는 “영국은 매주 3억5,000만파운드(약 5,500억원)의 분담금을 EU에 보낸다. 이제는 그 돈을 국민보건 비용으로 쓰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 문구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3억5,000만파운드’다.

이 숫자는 영국 내 ‘반(反)EU’ 바람의 선봉대 역할을 했다. ‘잔류냐 탈퇴냐(In or Out)’ 하는 이전투구의 와중에 이 문구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3억5,000만파운드는 그 자체가 동력이 돼 불황에 난민 문제까지 겹친 영국인의 피해 의식을 들쑤셨다. 특히 부유한 국가 내 중하위 계층을 중심으로 말이다. 3억5,000만파운드의 마성이었다.



언젠가 한 벤처사업가에게 “숫자는 사람을 너무 자신만만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비즈니스든 시합이든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는 생각보다 훨씬 모호해 흑과 백이 아닌데도 숫자는 그런 현실을 오해하게끔 유인한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은 실패인 듯해도 1년 뒤에는 매우 성공적일 수 있고 현재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 있는 사업도 결국에는 재정적 내구성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숫자는 비교가 쉽고 구체적이라는 장점 때문에 캐치프레이즈의 강력한 수단이 되고는 한다. 하지만 전체 맥락을 담기에는 그릇 자체가 작다. 그래서 숫자가 매력적일수록 맥락을 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이제는 영국인도 다 알고 있을 것 같다. 3억5,000만파운드 중 2억파운드는 EU 보조금 형태로 영국으로 회수된다는 사실을. 하지만 3억5,000만파운드의 진실은 국민투표가 끝나고 나서야 집중 조명을 받았다. 모두 숫자의 마성에 방심했는지 아니면 마성에 홀려 있었는지 모르겠다. 설득 수단으로써의 숫자를 검증하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된다.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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