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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REVIEW] 서민의 기생충 콘서트

기생충은 어떻게 지구의 2인자가 됐을까?

서민 저 | 을유문화사 | 376쪽 | 1만6,000원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터널 공사장에서 한 인부가 쓰러져 숨을 거뒀다. 빈혈이 직접적 사인이었다. 건강하던 인부가 왜 갑자기 빈혈로 목숨을 잃었을까. 부검 결과, 인부의 소장(小腸)에서 1,500마리가 넘는 기생충이 나왔다. 빈혈 증세를 보이던 또 다른 인부의 대변에서도 기생충이 검출됐다. 빈혈을 일으키는 구충은 이렇게 인간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

구충은 숙주의 장에 매달려 피를 빨아 먹는다. 그래서 ‘기생충계의 드라큘라’라는 나름 무시무시한 별명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구충은 착한 기생충에 속한다. 구충 한 마리가 빨아먹는 피의 양은 사실 0.15㎖ 정도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물론 이탈리아의 인부처럼 체내에 1,000마리나 모여 있으면 치명적이지만 그런 사례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구충은 피를 굳지 않게 하는 성분을 분비, 천연 항응고제 개발의 단초를 제공한다. 또한 알레르기나 자가 면역질환의 치료에도 쓰인다. 때문에 구충을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까지 생겼다. 이 업체는 ‘크론병 같은 염증성 장 질환과 천식, 습진, 알레르기 등의 면역질환에 효과가 있습니라’라는 문구로 구충을 홍보하고 있다.

착한 기생충이 있다면 당연히 나쁜 기생충도 있기 마련이다. 1990년 14개월 된 여자아이가 고열로 병원을 찾았다. 컴퓨터 단층촬영(CT) 결과를 본 의사들은 깜짝 놀랐다. 간과 비장이 비대해져 아이의 아랫배까지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이후 간 조직 검사를 했는데 수많은 기생충의 알이 발견됐다. 간모세선충의 알이었다.

다행이 이 아이는 살았지만 간모세선충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생충 가운데 하나다. 생존확률이 40%도 안 된다. ‘기생충계의 연쇄살인범’으로 부를 만하다. 정확히 진단이 이뤄지면 회충약으로 손쉽게 치료가 가능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착한 기생충, 나쁜 기생충, 독특한 기생충 등 3개의 카테고리로 구성돼 있다. 기생충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마치 인간 세계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좌충우돌 기생충의 본능
이처럼 착한 종도, 나쁜 종도, 그저 독특한 종도 있지만 모든 기생충은 한 가지 공통분모를 가진다.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생김새도 징그럽지만 우리 몸속에 소리 없이 침입해 기생하며 영양분을 빼앗아간다는 것 자체가 결코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특성 덕분에 기생충은 지구의 2인자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좋든 싫든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기생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박멸이 많이 이뤄졌다고는 해도 완벽한 퇴치는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지구에 인간이, 아니 생명체가 살아가는 한 기생충도 그들 곁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뭘까. 기생충을 더 잘 이해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서민의 기생충 콘서트’는 이렇게 인간과 기생충이 공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그들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책이다. 그런 탓에 단국대학의 기생충학자인 저자는 책 안에서 기생충들에게 어떤 우호감도, 어떤 적대감도 표출하지 않고 중도를 걷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구충이 참 나쁜 기생충 같다. 하지만 구충은 돼지편충과 더불어 알레르기와 자가 면역 질환의 치료에 쓰이는 좋은 기생충이다. (…) 이 연구가 잘 된다면 우리는 구충에서 추출한 항응고제를 통해 각종 질병을 예방할 수도 있다. 구충이 자신의 죄 갚을 치르고 인류에게 봉사할 그날을 기다려 보자.”

그는 때로 기생충의 관점에서 말하기도 한다. 숙주인 사람의 간에 서식하면서 영양분을 빼앗고, 알을 낳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잔인한 간모세선충에게조차 그것은 기생충의 본능일 뿐이라 항변한다. 심지어 지구 2인자로서의 패기마저 느껴진다고 말한다.

“기생충은 숙주, 특히 종숙주를 죽이지 않지만 어쩌겠니? 내 자식부터 살리고 봐야지. 숙주를 없애기 위해 난 알을 아주 많이 낳을 거야. 간경화 정도는 생겨 줘야 숙주가 죽을 것 아니겠니? (…) 기생충의 목적은 자손 번식이니까. 계속 이렇게 살다 보면 우리의 시대가 열릴거야. 이제 숙주가 죽어 가고 있으니 밝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렴.”




저자는 이 책이 2013년 출간한 전작 ‘기생충 열전’의 속편에 해당하지만 ‘기생충 열전2’가 아닌 ‘기생충 콘서트’로 제목이 바뀐 저간의 사정을 서문을 통해 꽤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를 읽다보면 그 사이 ‘글쓰기 아이콘’으로 부상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잔뜩 배어있다.


기생충 세계의 천태만상
적어도 필자에게 저자인 서민 교수는 기생충보다 더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간 것도 기생충이 아니라 순전히 저자에 끌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의 대가다. 이 책 역시 처음 듣는 기생충 이름이 수두룩하지만 결코 낯설지 않으며, 쉽게 읽힌다.

어쨌든 그가 소개한 기생충들의 면면은 놀랍기 그지없다. 좋은 놈, 나쁜 놈, 독특한 놈으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다. 숙주가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사는 ‘더불어 살자파’도 있고, 알이나 유충을 종숙주에게 보내기 위해 중간숙주를 죽이는 ‘나 혼자 살자파’ 도 있다. 때로는 숙주를 돕고, 때로는 숙주를 잔인하게 죽이지만 저자의 말처럼 기생충의 목표는 오직 하나 ‘자손 번식’이다.



개중에는 장기간 체내에서 암약하는 종도 있다. 샤가스병을 일으키는 크루스파동편모충이 그 실례다. 이 기생충은 대부분 수개월 내에 죽지만 일부는 수십 년 동안 인체에 기생하며 심장을 갉아먹는다고 한다. 특히 인체에 들어오면 조금만 증식한 뒤 곧바로 조직 속으로 숨어버려 잘 발견되지도 않는다. 감염자 대부분이 어릴 적 감염되지만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미있게도 기생충 주제에 남녀를 차별하는 녀석도 있다. 성병으로 분류되는 질편모충이 그 주인공이다. 이 기생충은 서식환경이 맞지 않는지 남성의 몸에서는 열흘도 못 견딘다. 반면 여성의 몸에서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 동안 살면서 고통을 준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파렴치한도 존재한다. 왜소조충이 그 이름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숙주의 면역체계가 약해지면 유충들이 일제히 숙주의 몸 곳곳을 공격한다.

고래회충의 경우 사람들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다. 지난해 매스컴에서 ‘위벽을 뚫는 고래회충’이라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생선회 기피 현상이 벌어졌는데, 저자는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보도인지를 알리기 위해 ‘서민 교수, 고래회충에 감염돼 입원’이라는 만우절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고래회충이 사람의 위를 뚫지 않을뿐더러 감염된 회를 먹더라도 사람이 감염될 확률은 0.001%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21세기에 기생충 시대가 온다?
자신감 넘치고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풀어가던 저자는 국내 기생충학의 현실을 언급하는 대목에 이르러 기운이 빠진 듯한 느낌을 준다. 의학이나 약학보다 상대적으로 저변이 좁고, 인기도 떨어지는 국내 기생충학의 현실에 대한 토로도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영화 ‘연가시’가 화제를 몰고 왔을 때 논문에서 읽은 지식밖에 없는 자신 같은 사람이 연가시에 대해 언론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국내에는 이 흥미로운 연가시를 연구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연가시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기생충인데도 말이죠.”




저자는 서울대 의대 본과 2학년 재학 시절 우연히 기생충학을 선택하면서 기생충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여러 방송과 대중 강연을 통해 기생충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는 그의 최종 목표는 ‘기생충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기생충 퇴치 약물을 개발한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일본 기타사토대학 오무라 사토시 명예교수와 미국 드류대학 윌리엄 캠벨 교수, 중국 전통의학연구원의 투유유 교수였다. 오무라 교수와 캠벨 교수는 회선사상충 치료제를, 투유유 교수는 말라리아 퇴치에 탁월한 약물을 개발해 제3세계의 기생충 퇴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동안 우리는 지구의 2인자를 너무 외면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친해지기는 어렵겠지만 존재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책은 이를 위한 몇 안 되는 친절하고도 재미있는 기생충 안내서이자 입문서다.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편집부/과학칼럼니스트 김형석 blade3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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