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널(오는 10일 개봉)’은 하정우(38·사진)라는 배우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갑자기 붕괴한 터널 속에 홀로 고립돼 구조만을 기다리는 남자 이정수를 연기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는 하정우가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2시간이라는 상영시간 대부분을 오롯이 홀로 끌어가야 하는 배우 입장에서는 부담될 법도 한 작품이다. 하지만 하정우가 ‘터널’ 촬영기를 떠올리며 가장 먼저 언급한 감상은 “재미있었다”는 것이었다.
“신이나 대사에 구애받지 말고 그 순간 제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알아서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감독님의 주문이었어요.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느끼는 것들을,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말들을 그대로 뱉을 수 있다는 자체가 짜릿했죠. 특히 전작 ‘아가씨’가 굉장히 정교하고 잘 디자인된 연기를 요구했다면 이번에는 거칠게 덩어리째 연기를 하는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의 작업이라 더욱 재미있게 한 것 같아요.”
하정우가 즉흥 연기를 하면서 신경 쓴 포인트는 웃음이었다고 한다. 대형 재난 속에서 번지는 유머라니. 의외인 듯하지만 그렇게 웃음을 잃지 않는 점이 바로 ‘터널’의 매력이기도 하다. 배우는 “말도 안 되게 릴렉스된 모습이라면 안 되겠지만 관객이 최대한 영화적 재미를 느끼게 해주면서 끌고 가는 것이 내 역할”이라며 “‘고통은 잠시, 재미는 길게’ 극한 상황이지만 절망적이지 않도록 삶에서 펼쳐지는 블랙코미디 같은 요소를 촘촘히 넣겠다는 것이 감독님과 나의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터널을 헤매다 자신의 차로 돌아오자 ‘집이다. 집에 왔어’ 등 혼잣말을 하거나 소중한 식량을 빼앗긴 나머지 괴성을 지르다가 “꿈꿨어요”라고 얼버무리는 부분은 예기치 못한 웃음을 주는데 대부분 하정우의 애드리브였다고.
그러고 보면 극한 상황에서도 낙천성과 웃음을 잃지 않는 이정수의 모습은 관객들이 생각하는 배우의 평소 모습과도 참 닮아 보인다. 하정우 역시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는 뭔가를 꾸며내고 캐릭터를 만들기보다 내가 들어가 내 말투를 쓰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며 수긍했다. 배역이 아니라 배우가 보이는 것 같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그것도 괜찮은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나의 롤 모델은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인데 예전에는 드니로가 더 흥미로웠어요. 드니로는 작품마다 자기 복제를 거부하며 끝없이 변신을 시도하는 것 같았고 알 파치노는 ‘나 그냥 똑같은 거 할 거야’ 하며 주구장창 비슷한 역할만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알 파치노가 오히려 정답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요. 그 배우의 느낌을 토대로 캐릭터가 더 풍성해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는 이어 말했다. “어차피 연기라는 것이 경쟁하고 금메달을 따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내게는 평생 해야 할 직업이기도 하니까.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을 하며 다양한 시도를 할 겁니다. 계속 연마하며 정답을 찾아가야겠죠.”
/김경미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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