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우리 주거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사라져가고 있다. 이는 주거 공간이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적 폐쇄성과 함께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 ‘누가 내 이웃인지 모르게 되는 개방성’이라는 모순된 개념이 아파트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10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설계 공모해 지은 ‘LH 강남 힐스테이트’는 어느새 사라져가는 우리 시대의 주거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한 새롭고 의미 있는 시도라 할 만하다. 건물 가운데 공간을 가둬놓아 자칫 폐쇄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모습은 오히려 그 공간 속에서 걷고 대화하는 사람을 우리 동네 사람임을 확신시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모든 세대의 현관 앞을 지나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순환식의 복도는 중앙 정원의 건너편에 사는 어느 누구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과 함께 개방감을 주고 있다.
●중정(中庭)을 통한 독립과 통합
오각형·육각형 건물에 둘러싸인 중앙정원
각각의 주택 하나로 모은 ‘소셜믹스’ 시도
‘LH 강남 힐스테이트’는 LH가 설계공모를 통해 공동주택 설계경험이 많은 ‘선진엔지니어링종합건축(대표 정종화)’에 설계를 맡겼으며 현대건설이 시공을 맡았다. 사업에 참여한 발주처와 시공사·설계사가 수많은 경험을 가진 만큼 실험적인 시도가 가득해 여러모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선 전체 단지는 5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ㅡ’자형이나 ‘ㄱ’자형·‘ㄷ’자형이 아닌 ‘5각형’이나 ‘6각형’ 등 다각형의 건물이 중앙 정원(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다. 건물의 한 곳이 뚫려 있어 외부에서 중정으로 들어와 다시 건물 현관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식이다.
이 때문에 각 동은 독립적이지만 또한 통합적인 공간이다. 설계사인 선진엔지니어링종합건축사사무소 관계자는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는 건물 하나일 뿐이지만 이곳에서는 건물 하나가 독립된 하나의 단지가 되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중정은 나무와 놀이터·운동기구와 산책로 등으로 구성돼 있다. 애초 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 정원이 아니라 유럽의 공원과 같이 잔디와 벤치가 있어 앉아서 쉴 수 있는 빈 공간으로 설계됐지만 한국적 정서를 반영해 다소 바뀌었다.
●공공의 특징 살리면서도 일탈 꿈꾼 아파트
반지처럼 500~600m 이어진 편복도
이웃과 인사 나누는 산책로처럼 이용
건물 내부 설계도 다양하다. 505동의 경우 ‘중복도식(복도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세대가 들어서 있는 형태)’으로 지어졌다. 흡사 호텔 내부와 비슷한 모습이다. 복도 가운데쯤 외부에 노출돼 있는 휴게 공간이 있다. 중복도식 건물의 단점 중 하나인 환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인 공간이자 해당 층의 주민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는 커뮤니티의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중복도식과 달리 ‘편복도식’으로 설계된 다른 아파트 동은 복도가 반지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다. 동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500~600m는 족히 된다. 복도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웃과 마주칠 수 있으며 중정의 곳곳을 살펴볼 수 있어 산책로처럼 이용되기도 한다.
민간 아파트와 달리 크기가 다른 주택들이 한 건물에 모여 있게 만든 것도 특징적이다. 이른바 건물 내부에서도 공동체 형성을 위한 ‘소셜믹스’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건물은 부정방형이지만 세대 내부 설계는 여전히 내부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판상형’의 공공아파트 전통을 잇고 있다. 때때로 복도를 위아래로 감싸는 형태로 설계된 복층형 아파트와 같은 파격적인 일탈도 시도하고 있다.
선진엔지니어링 관계자는 “LH가 처음 설계를 위한 입찰 안내서를 보내올 때 가장 중요하게 요구한 것이 새로운 아파트 유형을 제안하라는 것이었다”며 “도대체 아파트에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말했다.
● 통일된 디자인 속 변화와 다양성 공존
롤러코스터 같은 옥상…슬라이딩 윈도
건물 곳곳 설계자 번뜩이는 발상 눈길
전체적인 디자인도 특색이 있지만 건물 곳곳에서 보이는 설계자의 ‘반짝’거리는 발상은 건물을 보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 아파트의 외관에서 가장 독특한 것이 창문에 설치된 슬라이딩 윈도(미닫이창)다. 슬라이딩 도어가 없는 상태에서는 건물의 외관은 층을 나눠놓은 평행한 선만 눈에 띈다. 위 세대의 창문과 아래 세대의 창문이 똑같은 곳에 설치돼 외관에 통일감은 느낄 수 있어도 변화는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거주민들이 창문에 설치된 슬라이딩 도어를 완전히 닫아두거나 반쯤 열어두고 있어 외관에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다.
같은 동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곳은 18층에 달하고 또 어떤 곳은 6층에 불과하다. 이는 건물 옥상이 롤러코스터처럼 위로 솟았다 아래로 내려갔다 하는 모습을 하게 만들었다. 바람이 그 길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불어와 사방이 막혀 있는 중정에서도 전혀 답답한 느낌을 들지 않게 하고 있다. 선진엔지니어링 관계자는 “높이를 달리해 들쭉날쭉한 건물의 스카이라인은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의 모습이 꼭 사각형일 필요는 없다는 의미”라며 “아이들에게 서 있는 곳마다 다른 형태로 보이는 하늘을 보면서 다양한 사고를 가지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 주공 아파트의 변신
‘밋밋한 주공 아파트’는 옛말 … 설계 혁신 주도한 LH의 실험정신
한때 ‘주공아파트’로 불렸던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공공아파트는 서민들의 아파트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서민 아파트’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했다. 네모 반듯한 판상형에다 내부설계도 3베이(3개의 방과 거실이 아파트 전면에 배치된 형태)가 대부분으로 큰 고민 없이 지어진 아파트로 받아들였다. 공기업이 짓는 아파트이기 때문에 마감재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으로 사용해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국내 아파트 문화는 LH의 실험정신으로 상당한 변화를 맞게 됐다. 여전히 판상형 사각형 아파트가 주를 이뤘지만 때때로 민간 건설사가 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혁신적 설계와 개념을 LH 아파트가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90년대 말부터 국내 아파트에 친환경 설계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부산 당감지구 공공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계단식 테라스 구조로 건물을 짓고 단지 내에 개울을 만드는 등 파격적인 설계가 돋보였다. 지금 위례신도시나 광교신도시 등 주요 택지지구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테라스하우스의 원형인 셈이다.
이후에도 LH 아파트는 혁신을 거듭했다. 제주도 노형지구 ‘뜨란채’는 제주도 자연환경과의 조화가 돋보인 설계를 선보였으며 판교 휴먼시아 e편한세상은 타운하우스 같은 아파트 설계를 제안하기도 했다.
특히 2010년 분양한 판교신도시의 ‘월든힐스’는 국제현상설계를 통해 일본의 실험주택으로 유명한 야마모토 리켄, 노키아 본사를 설계했던 핀란드의 페카 헬린, 미국의 마크 맥 등이 설계자로 참여하면서 LH 공공아파트 디자인에 대한 대중의 시선을 변화시킨 사례였다.
가장 최근에는 ‘LH 강남 힐스테이트’와 이웃하고 있는 서울 강남지구 A4블록 ‘강남브리즈힐 아파트’를 들 수 있다. 이 아파트는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내부 평면보다 외부공간 활용에 초점을 맞췄다. 이 때문에 아파트라는 공동주거시설 속에서 옆집과 어떻게 대지를 공유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 아파트라는 극찬도 받았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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