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정기국회의 축소판이자 예고편.’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표결을 놓고 여야가 극한 대치를 보인 23일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날 국회가 보여준 모습에 대해 이 같은 총평이 나왔다. 거야(巨野)의 힘을 제대로 과시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어질 정국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으며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거취 문제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등 각종 현안을 놓고 여야가 사사건건 부딪힐 것임을 암시하는 ‘예고편’이었다는 것이다.
이날 여야는 김재수 장관의 해임 건의안 상정을 둘러싸고 하루 종일 진통을 거듭하며 ‘난장판 국회’를 연출했다.
새누리당은 오전 9시에 시작된 의원총회를 오후 3시까지 끌면서 당초 오전 10시에 시작될 예정이던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이 오후 2시가 넘어 시작됐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대정부질문에 앞서 “해임건의안 처리를 위해 예정된 본회의 일정은 오늘 하루뿐”이라며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처리시한 준수를 위해 오늘 대정부질문을 마친 후 해임건의안을 상정해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해임안을 상정할 뜻을 밝혔다.
이에 따라 새누리당은 질문자로 정해진 의원들을 본회의장에 투입해 사실상 ‘필리버스터’ 작전을 펼쳤다. 국무위원의 장시간 답변을 유도하고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시간을 끄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해임안은 본회의 보고 후 72시간 안에 표결에 부쳐져야 하기 때문에 22일 오전10시3분에 보고된 해임안을 오는 25일 오전10시3분까지 저지하면 폐기된다.
새누리당의 첫 질문자였던 정우택 의원은 황교안 국무총리의 답변을 길게 만드는 방식으로 50분가량을 보냈으며 임이자 의원도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원론적인 질문을 물어보며 시간을 끌었다. 사상 초유의 ‘국무위원 필리버스터’가 이어지자 참다 못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적당히 하세요, 이제”라고 고함치기도 했다.
새누리당은 이날 한때 실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이용해 해임건의안을 자동 폐기하게 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하지만 본회의 개의 전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해야 한다는 국회법 규정에 따라 이 전략은 무위로 돌아갔다.
대신 정진석 원내대표는 오후 7시50분께 “국무위원에게 식사시간을 30분만 달라”고 주장하며 국회의장 및 야당 소속 의원들과 장시간 실랑이를 벌였다. 정 원내대표는 “(국무위원들에게 식사 시간을 주지 않을 거라면) 의장님도 식사하지 마셨어야죠”라며 “의장은 밖에 나가서 밥 먹고는 말이야”라고 비꼬았다. 이에 정 의장은 “김밥 돌아가면서 드시면 되죠. 오늘 새누리당 의총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라고 목청을 높였고 정 원내대표는 “이건 의회 독재”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야당 의석에선 식사 시간을 핑계로 필리버스터를 시도한다는 뜻의 ‘필리밥스터’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결국 약 40분 동안 고성과 삿대질, 가벼운 몸싸움이 오간 끝에 3당 원내대표 간 합의에 따라 정 의장이 오후 8시26분께 ‘오후 9시 본회의 속개’를 선언하면서 여야는 심야까지 진통을 거듭했다.
새누리당이 이처럼 김 장관의 해임 건의안 통과 저지에 사활을 걸고 나선 것은 김 장관이 낙마할 경우 정권 말 정국의 주도권을 그대로 거대 야당에 넘겨줘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야당이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대로 민감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수적 우위를 앞세워 여당의 발목을 잡을 경우 박근혜 정부는 조기 레임덕 진입은 물론 식물정부로의 전락도 불가피해진다. 실제로 제3당인 국민의당은 지난 21일 해임 건의안 제출에 동참하지 않으며 야권 공조에 균열을 냈으나 이날 내부 논의 과정에서 상당수 의원들의 기류가 ‘해임 찬성’ 쪽으로 기울면서 새누리당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됐다. /권경원·나윤석·박효정기자 nahe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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