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해 5월10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은 누구보다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오랜 경영 수업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지닌 카리스마와 사업적 감각을 따라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회장의 스트레스는 일반 사람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컸습니다. 말이 쉽지 아버지가 일군 사업들을 정리하고 '아버지의 사람들'을 떠나 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내부에서 말도 워낙 많았구요…."
최근 자리를 함께한 삼성의 한 고위 인사는 1년반이 넘는 시간 이 부회장이 겪었던 심적 고충을 제법 소상하게 전했다. 이 부회장 개인의 일상사가 제법 섞여 있는 터라 시시콜콜 글로 전할 수는 없지만 대기업 총수의 후계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충분히 알 듯했다.
물론 이 부회장은 나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아니 그 나이(47)에 좀처럼 감당하기 힘든 선택들을 짧은 기간 너무나 많이 해냈다.
한화와의 빅딜로 대변되는 계열사 사업 재편은 물론이고 전용기 매각과 직원들의 업무방식 변환 등 실용적 노선은 젊은 총수만이 꺼낼 수 있는 사업적 판단이었다. 삼성서울병원 문제와 스마트폰 사업의 부진이 안타깝지만 이를 두고 그의 경영 능력과 결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그의 경영 능력을 굳이 점수로 평가할 때, "'A' 정도는 줄 수 있을 것"(전직 삼성 CEO)이란 말에 고개를 끄떡이는 이유다.
그렇다고 그의 경영 행보를 마냥 추켜세울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회장 본인과 수십만에 이르는 삼성맨들은 도리어 'A+'가 아닌 이유를 좀 더 곱씹어야 하고 이 시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보다 냉혹해질 필요가 있다.
지난 1년반 이 부회장의 경영이 '실용주의'라는 말로 칭송받고 있다지만 이는 조금 빠르고 단편적이다. 사업재편이나 계열사 간 과감한 지분 변동 등 격랑에 비유할 만큼 혼란스러웠던 삼성의 시간은 사업적 목적을 위한 '과정이자 수단'일 뿐이지 궁극적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최고경영자(CEO)에게 과정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과정이 아무리 훌륭해도 성과도 보여주지 못하면 실패한 CEO다.
삼성 스스로도 인식하겠지만 지금의 사업 모형을 유지해서는 생존 자체를 보장받을 수 없다. 스마트폰 사업이 가져다주는 부(富)의 크기는 10년 안에 지금의 10분의1로 줄어들 것이다. 어쩌면 이미 스마트폰 사업 자체가 삼성의 영역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만 방심하다가는 노키아 이상의 끔찍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다.
결국 지금은 "이재용이 생각하는 삼성의 미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경영의 산물(産物)로 답할 차례다.
또 하나, 이 부회장은 지금 '안(그룹 내부)'을 촘촘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삼성 직원들은 어느 때보다 뒤숭숭하고 착잡하다. 상처도 많이 받았다. 사업 재편과 대규모 인사는 직원들에게 환호 대신 안타까움을 가져다줬다.
보다 진화한 삼성의 모습을 일궈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인사의 뒤끝이 가져다주는 직원 개개인의 상실감은 오너로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아픔이다. 그 불안함은 아직도 씻기지 않고 있고 직원들의 마음속에는 "또 무엇일까"라는 단어가 가슴에 파여 있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하다. 이 부회장에게 던져진 새로운 숙제는 바로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면서도 직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일, 쉽게 어우러질 수 없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는 것이다. 그 길이 지난(至難)하고 힘겹더라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후계자가 될 수 있고 삼성과 대한민국도 살 수 있다.
/김영기 산업부장 you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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