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창업 이후 100년 이상 필름 시장에서 부동의 세계 1위였던 코닥(Kodak)은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읽지 못해 몰락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코닥은 1975년 디지털 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등 다수의 디지털 이미지 특허를 확보했다. 하지만 경영진이 필름 시장이 존재하는 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판단, 디지털 기술 개발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강정수(46·사진) 메디아티 대표는 “전통 미디어가 디지털 혁신의 흐름을 타지 못하면 코닥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미디어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강 대표가 선택한 것은 미디어 스타트업을 키우는 일. 디지털 미디어 업계의 ‘구루(guru)’로 통하는 강 대표가 지난 7월 설립한 메디아티(Mediati)는 국내 최초의 미디어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를 표방하고 있다.
18일 장충동 메디아티 본사에서 만난 강 대표는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에서 미디어의 방향을 찾고, 수익성에 대한 고민도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레거시 미디어(전통 미디어)는 과거에 비해 구독자(혹은 시청자)가 줄어들면서 고령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심각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긴 하지만 대형 언론사 중에 문을 닫는 곳은 아직까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실질적인 위기가 닥쳐야 근본적인 혁신이 이뤄지지만 아직까지 대형 언론사 입장에서는 안정된 기존 수익원을 포기할 만큼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위기가 지연된) 상태가 디지털 혁신을 가로 막고 있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목한다.
“독자들이 더 이상 뉴스 공급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체계적으로 뉴스를 읽지 않습니다. 9시 뉴스를 기다리지도 않고 다음날 아침 현관 앞에 배달될 신문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뉴스 소비가 파편화되고 소비 경로가 다양해지고 있는 거죠. 주류 언론의 의제 설정 기능이 약화되면서 새로운 뉴스 유통 모델이 출현하고 있는 겁니다. 바야흐로 ‘비선형 소비(non-linear consumption) 시대’ 혹은 ‘분산 미디어(distributed media)’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미디어 업계에도 새로운 전략, 새로운 어법, 새로운 인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강 대표는 전통 미디어 조직이 혁신하기 어려운 가장 핵심적인 이유로 조직 내 권력 문제를 꼽고 디지털 혁신을 위해 리더를 전격 교체한 콘데나스트의 사례를 소개했다.
‘보그’ 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잡지그룹 콘데나스트의 안나 윈투어는 지난해 ‘얼루어’의 편집장을 자르고 디지털 출신의 ‘나일론’ 편집장인 미셸 리를 그 자리에 앉혔다. 디지털 혁신의 중요성을 숱하게 강조했지만 신입 직원들이 종이 에디터 밑에 줄을 서려고 하는 모습을 목격한 후, 편집장 교체를 통해 ‘기존 종이 권력만 바라보고 있으면 발전도, 승진도 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강 대표는 우리 언론 역시 기득권이 종이 신문(혹은 공중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권력의 이동 혹은 분산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는 경영진이 빠져 있는 트래픽의 함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가 어젠다 셋팅인데, 언제부터인가 어젠다를 발굴하고 독자의 반응을 끌어내는 일보다 트래픽이나 도달률을 중요하게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신문 발행부수가 지나치게 많은 편입니다. 조선일보가 100만부 넘게 팔린다고 하면 외국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르몽드나 FAZ(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너차이퉁) 같은 정통지들도 30만∼40만부 밖에 찍지 않아요. 판매 부수와 매체의 신뢰도가 비례하지는 않다고 보는 거죠. ‘가디언’의 판매 부수가 30만부라고 해서 300만부인 ‘더 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한국의 미디어는 발행부수와 시청률, 트래픽의 함정에 빠져 있어요. 수치로만 표시되는 성과 지표 때문에 잘못된 동기 부여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의사결정권자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에 대한 성찰과 변화가 가능할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 강 대표는 신생 미디어의 다양한 실험이 전통 미디어가 혁신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종이의 시대는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전통 미디어의 생명을) 인공호흡으로 유지시키고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연명 자체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모바일 시대에 태어나 모바일 밖에 모르는 ‘모바일 온리(only)’ 세대가 뉴스 소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어요. 이제는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디지털 세대와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문법과 필터를 고민해야 합니다. 종이 신문의 데스크 밑에서 줄을 서는 게 아니라 모바일에서 어떻게 저널리즘의 가치를 찾아내고 이를 어떻게 비즈니스적으로 구현할 지 고민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메디아티의 투자를 받는, 혹은 받으려는 미디어 스타트업에게 남들보다 더 잘 할 수 없거나, 다르게 할 수 없다면 아예 시작하지도 말라고 잘라 말합니다.”
현재 메디아티는 투자가 실제 이뤄지는 ‘투자 프로그램’과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파트너 프로그램’ 두 가지로 운용하고 있다. 투자가 이뤄질 경우에는 지분 10%에 4,000만원, 15%에 6,000만원을 지원한다. 현재 투자가 확정된 스타트업은 ‘닷페이스’이며, ‘디에디트’, ‘알트’, ‘코리아 엑스포제’, ‘희철리즘’이 파트너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메디아티의 첫 번째 투자처로 닷페이스를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탄탄한 맨파워와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미디어로서의 근성을 꼽았다. 닷페이스는 20대 후반 연령층을 타깃으로, ‘뉴노멀’을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촬영부터 편집까지 2시간 안에 끝내는 발빠른 콘텐츠 생산 능력도 강점이다.
“닷페이스에 영상 퀄러티는 천천히 높여도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미디어로서의 문법, 즉 내러티브 방식은 새로워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기존 미디어의 문법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 차원에서 명확한 ‘타깃 오디언스’를 설정하고, 그들만의 어법으로 소통하는 닷페이스는 남다른 장점을 갖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강 대표는 저널리즘 분야뿐만 아니라 패션이나 뷰티 등 버티컬(vertical) 콘텐츠를 다루는 미디어 스타트업, 데이터 분석 기업과 같은 기술 스타트업 등에도 투자할 계획이다. 미디어 스타트업의 관건인 비즈니스 모델 확보는 오디언스 세분화 전략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강 대표는 “미국의 복스미디어는 산하에 SB네이션(SB Nation·스포츠), 더 버지(The Verge·IT), 폴리곤(Polygon·비디오 게임), 커브드(Curbed·부동산), 이터(Eater·요리), 랙크드(Racked·패션) 등 10여개 브랜드를 두고 있다”며 “복스가 산하 매체들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수익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디어 스타트업계에서 성공 모델이 잇따라 나오면 전통 미디어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물론 전문화된 인력을 수혈 받는 길도 열린다고 보고 있다. 최근 언론계에서 공채 비중을 줄이고 경력 채용을 늘리는 추세와 맞물려 디지털 미디어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인적 자원이 공급되면 언론사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전문 인력, 더 나아가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디지털 미디어 전문 인력(혹은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기존 언론사에 진입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새로운 실험에 나서고 있는 강 대표가 생각하는 지속 가능한 미디어, 그리고 이를 위한 미디어의 혁신이란 무엇일까.
“미디어를 혁신하라는 말은 기존에 없던 전혀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전통 미디어가 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라는 것이죠. 나만의 타깃 오디언스를 설정하고 그들의 시각에서, 그들의 어법으로 다가 서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60대 실버층이 타깃 오디언스라면, 철저하게 그들의 시각과 어법, 입장에서 뉴스를 제공하는 겁니다. 수십 년 전 지금처럼 다양한 매체가 없었을 때 독자들이 신문의 연재 기사를 기다렸던 것처럼, 타깃 오디언스를 충성 독자로 확보하고 그들이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매체가 돼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그 시장에서는 절대 강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광고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 붙으면서 영속성 있는 사업이 가능해질 겁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미디어의 혁신도 유의미한 법이니까요.”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강정수 대표는 디지털사회연구소 소장, 오픈넷 이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슬로우뉴스 편집위원 등 디지털 미디어 분야에서 여러 직책을 맡고 있다.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독일 비텐-헤어데케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온라인 뉴스는 왜 0(zero)으로 수렴하는가’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면서 디지털 저널리즘과 디지털 경제 분야로 보폭을 넓혔다. 강 대표는 스스로 ‘타임(TIME·Technology, Information Technology, Media, Entertainment)’ 산업을 오랜 기간 연구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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