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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춘 글로벌 500 | 에이즈 운동가와 은행가

  • BY PATRICIA SELLERS
  • 2016-10-26 16:45:42
  • 기획·연재
내부자와 외부자 - 바클레이즈 CEO 제스 스테일리(왼쪽)는 동생 피터의 미션을 지지하고 있다.
제스와 피터 스테일리 Jes and Peter Staley 형제는 둘 다 JP모건 출신이다. 한 명은 최고 경영진을 거쳐 현재 바클레이즈 CEO로 일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명은 에이즈 운동가가 되어 형의 생각은 물론, 세상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피터 스테일리가 HIV 양성 판정을 받았을 때 그의 또 다른 고민은 형 제임스 James-주로 제스(이름 첫 글자를 딴 별명)라고 불린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당시로선 사형선고와도 같았던 에이즈 진단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5년 당시 피터는 24세였다. 그가 28세였던 제스-피터는 형이 동성애에 상당한 반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를 따라 JP모건에서 전도유망한 커리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리더에 오르기까지 평행선을 그려온 두 형제의 비범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현재 59세인 제스는 JP모건과 합병 후에는 JP모건체이스 JPMorgan Chase(올해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55위에 선정되었다)에서 고속 승진을 거듭해 자산운용 부문, 나중에는 투자은행까지 총괄하는 자리까지 올랐다. 올해 55세가 된 피터는 월가의 미국 국채 트레이더 중 처음으로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HIV 양성 판정 사실을 밝힌 인물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에이즈 활동단체 액트업 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의 리더로서 피터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일각에선 가장 악명 높은-LGBT (*역주: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를 합쳐 부르는 단어) 이자 에이즈 운동가가 되었다.

90년대 에이즈 문제의 심각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피터는 10번이나 체포되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빅파마 Big Pharma의 HIV ? 에이즈 치료제 가격에 반대해 뉴욕증권거래소(NYSE) 발코니에 스스로를 묶고, ‘부당이득을 중단하라’고 쓰인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뿌린 사건이었다. 피터는 말한다. “제스는 JP모건에서 매우 껄끄러운 일이 생겼음에도-뉴욕증권거래소를 마비시킨 뒤 피터는 월가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전혀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제스는 동생 덕분에 “개인적으로 본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고, 사내 다양성의 중요함을 이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JP모건은 LGBT 인권 신장 부분에서 선구자로 떠올랐고, 그런 변화 뒤에는 제스가 있었다. CEO 제이미 다이먼 Jamie Dimon의 눈 밖에 나서 2013년 회사를 떠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제스를 다이먼의 후임 CEO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영국 소재 거대 은행 바클레이즈는 제스와 접촉해 CEO직을 제안했다. 최근 스테일리 형제는 포춘과 만나 얘기를 나눴다. 형제 관계와 각각 다른 리더십 경로에서 배운 교훈을 털어놓은 첫 번째 언론 인터뷰였다.


포춘: 1985년 가을로 돌아가 보자. 피터 당신은 JP모건에서 채권 트레이더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몸 상태가 좋지 않고 감기가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피터 스테일리(이하 피터): 입사 2년 차 때 비밀 연애를 하던 남자친구와 ‘때 이른 서리(An Early Frost)’라는 최초의 HIV ? 에이즈 관련 TV 영화를 봤다. 감기가 심하게 걸렸을 때였다. 에이즈로 죽어가던 영화 주인공 에이던 퀸 Aidan Quinn도 주폐포자충 폐렴(PCP)에 걸려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당시 남자친구는 “저 사람과 똑같이 기침을 한다”며 날 놀렸고, 나는 “알았어, 병원에 가 보면 되잖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HIV 양성 진단을 받았다.


HIV 양성 외에도 에이즈 관련 합병증(AIDS-related complex) 진단을 받았는데.
피터: 그렇다.


에이즈와 다른 것인가, 아니면 같은 증상인가?
피터: 다르다. 그리고 그건 더 이상 쓰지 않는 질병 분류다. 에이즈 전조 증상인 면역 억제 반응을 보이는 환자를 지칭하는 용어다. 이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에이즈 진단의 정의를 CD4 세포 수가 (혈액 1mL당) 200개 이하인 경우로 변경했다. 1987~1988년 때 내 경우는 107개였다. 나처럼 CD4 세포 수가 200개 이하로 떨어질 경우, 일반적으로 2년 정도를 시한부로 봤다. 난 삶을 연장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당시에 열심히 투병하면 남은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고 믿었나, 아니면 2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나?
피터: 그런 건 알지 못했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고, ‘2년’이라는 데 너무 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는 꽤 효과적으로 생각을 분리했다.


형에게 감염 사실을 어떻게 알렸나?
피터: 진단을 받고 10일 이내에 그에게 말했다. 주변에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나 혼자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추수감사절에 부모님 댁을 방문해 가족들에게 사실을 말할 계획을 짜기도 했다.


체포 과정에서도 굴하지 않다.
1989년 아스트라제약 건물에서 구속되고 있는 피터. 10번의 체포 이력 중 하나였다.
그때가 1985년 추수감사절이었다.
피터: 맞다. 가족들에게 한 명씩 따로 얘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가장 쉬운 상대-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사람-에서 시작해 가장 어려운 사람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어머니께 말하는 게 가장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뒤에서 두 번째가 제스 형이었다.


제스, 그건 당신에게 놀라운 일이었나?
제스 스테일리(이하 제스): 피터의 HIV 진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당시에는 사망 통지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과 가까운 사람이나 직계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그런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병에 가까워진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나서 피터와 대화를 나눴다. 동생은 내가 가족 중에서 가장 동성애 혐오적인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마 우리 둘 다 월가에서 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당시 월가는 동성애에 대해 뭐라 비난해도 괜찮은 유일한 집단이었다.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용어를 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피터는 채권 데스크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피터: ‘F’로 시작하는 동성애자 비하 표현을 하루에 20번은 들었다.

제스: 2000년이나 2001년까진 ‘패것 faggot’ (*역주: 원래 의미는 ‘장작’이지만 남자 동성애자를 경멸하는 단어로도 쓰인다)이라는 단어 사용이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피터는 조용히 몰래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폭발적인 에너지와 함께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사실을 밝혔다. 개인적으론 피터에게 동성애 혐오자로 비춰진 내 모습을 지우고, 그가 직면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후 수 년 간 나는 피터가 엄청난 역경을 딛고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는 걸 지켜봤다. 피터와 그 친구들의 역정을 지켜보면서 내 인생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선 세상을 바꿨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터 당신은 1985년 가족에게 HIV 양성 진단 사실을 밝힌 후, 직장에선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피터: 가족 구성원 모두 “우리가 뭘 해 주면 되냐”고 물었다. 형의 첫 번째 과제는 (웃음) JP모건에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가 문제였다. 나는 삶을 유지하고 싶었고, 직장을 그만두기도 싫었다. 형은 “은밀히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을 알 것 같다”고 했다. 브라질에서 함께 일했던 형의 상관 윌리엄 올린 William Oullin이었다. 동성애자면서도 사내에서 꽤 높은 위치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제스가 나를 그에게 소개시켜주었고, 윌리엄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피터: JP모건이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폭풍이 상당했을 것이다. 직장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후 1년 간 낮에는 동성애 성향을 숨긴 채 채권 트레이더로, 밤에는 에이즈 운동가로 정신 없이 지냈다. 시위에 참가할 땐 플래카드를 얼굴까지 올려 뉴스에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서도 (에이즈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기금을 모았다. 그러나 이중 생활의 타격은 컸다. CD4 세포 수가 급감했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상사의 사무실을 방문해 상황을 전부 고백하고, “지금부터 장애 휴가를 쓰겠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고, 내일부터는 전업 에이즈 운동가로 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스, 동생은 전체 시스템을 바꾸려는 에이즈 환자이자, 오늘날 활동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운동을 펼친 유명인사가 됐다. 당시 JP모건에서 승진을 거듭하던 입장에서 피터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나? 동생과 이런 주제의 대화를 얼마나 나눠봤나?
제스: 많이 했다. 브라질에서 복귀해 JP모건 주식데스크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일하던 어느 날, 피터가 전화를 걸어와 “다음 날 일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내일 오전 데스크 근처에 있어”라고 말했다. 그 날이 바로 피터가 동료 세 명과 함께 버로스 웰컴 Burroughs Wellcome의 (에이즈 치료제) 가격에 대해 시위를 벌이고 뉴욕증권거래소를 점령해 사상 처음으로 거래소가 폐쇄됐던 날이었다. 당시 데스크에 있었는데 거래가 중단됐던 게 기억난다. 난 “이거 내 동생이 한 일이야!”라고 외쳤다.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그 때 당신은 거래소 발코니에 있었다.
피터: 맞다. 체인으로 난간에 손목을 묶은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를 내보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증시 개장을 알리는 ‘오프닝 벨’ 소리를 덮어버리기 위해 뱃고동 소리와 큰 배너를 챙겨갔다.


‘웰컴을 팔아라’라고 쓰인 배너였는데.
피터: 뒷면에 ‘부당이득을 중단하라’고 쓰인 100달러 위조지폐도 있었다(웃음). 그건 트레이더들을 약간 짜증나게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위조지폐를 사방에 뿌렸다. 그 행위는 (1967년) 뉴욕거래소 안에서 시위한 유일한 운동가인 애비 호프먼 Abbie Hoffman에 대한 오마주였다.


이후 웰컴은 실제로 AZT 가격을 낮췄다.
피터: 우리는 뉴욕 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 1면에 실렸고, 웰컴은 그 3일 후 치료제 가격을 20% 인하했다.

제스: 피터는 그 일로 감옥에 끌려갔다. 그 때 말고도 여러 차례 수감됐다. 어떤 면에서 뉴욕증권거래소를 중단시키는 건 장려할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피터는 자신의 목숨과 HIV에 감염된 사람들의 목숨을 위해 싸웠던 거였다. 동생을 사랑하는 형으로서, 형제라는 입장에서 먼저 생각했다. 사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피터의 활동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용기-사형선고와 싸우기 위해 매일 아침 일어나는 용기-가 정말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피터는 미국 전역을 뒤흔들어 놓았다.

피터: 형은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액트업 전략을 짤 때 형과 아버지, 누나 재닛 Janet 등 가족 전체의 반응을 보고 결정했다. 가족들이 액트업에 대한 피드백도 주었다.


보트 위의 스테일리 가족 - 1970년대 초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서 맏형 크리스, 누이 재닛과 함께 한 제스(오른쪽 뒤)와 피터(오른쪽 앞) 스테일리 형제.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반응한 적은 없었나?
피터: 단 한 번도 없다.


다른 사건도 많았다. 버로스 웰컴 사무실을 급습하기도 했는데.
제스: 더 대단한 건 (상원의원) 제시 헬름스 Jesse Helms의 집에 대형 콘돔을 씌운 것이었다. 그건 기발한 일이었다.


피터, 당신의 아이디였나?
피터: 그렇다. 제시 헬름스는 최대의 적 중 한명이었다. 그는 수 년 간 HIV 환자들을 겨냥한 법안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있었다. 입국금지법을 제안한 사람이기도 했다. 미국은 처음으로 HIV 양성 진단을 받은 사람들의 입국을 금지한 국가가 됐고, 이후 지구상 모든 국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어마어마한 피해를 끼친 인물이다. 그는 상원 의사당에서 동성애자들을 비판했고, 우리가 죄를 짓고 있으며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헬름스에 대항한 시위를 하면서도, 다른 상원의원들의 기분은 크게 상하게 하지 않을 만한 아이디어-비웃을 수 있을 만한 것-를 생각했다. 존 스튜어트 Jon Stewart (*역주: 미국의 유명 시사풍자 토크쇼 진행자이자 코미디언) 식의 행동주의였다. 상대를 모두의 조롱거리로 만듦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위축시키는 방법이었다. 그 후 헬름스가 에이즈 관련 개정안을 더 이상 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1991년의 일이었다. 제스, 동생이 지나쳤다고 생각하나?
제스: 아니다. 난 피터를 크게 지지했다. 액트업에 더 많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래리 크레이머 Larry Kramer (*역주: 미국의 유명한 에이즈 운동가이자 극작가) 도 여러 차례 만났다. 당시는 JP모건에서도 상황이 변하기 시작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힌 직원들이 하나 둘 나오던 시점이었다. 사람들이 성적지향성(sexual orientation)에 대해 좀 더 편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피터와 액트업 참여자들은 진정 근본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피터: 90년대 말부터 JP모건이 직장 내 LGBT 인권 보장에서 선도적인 기업이 됐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월가에서 일하는 동성애자들은 형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말했다.


제스,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LGBT 분야 활동에 힘쓰기 시작했나?
제스: 진짜 변곡점은 JP모건과 체이스가 합병한 2001년인 것 같다. 당시 모건의 프라이빗 뱅킹 부분 책임자로서, 기업 명의로 후원 수표를 작성하고 일종의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 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회사가 상황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JP모건은 법인으로선 처음으로 교육 단체 GLSEN(게이 ? 레즈비언 ? 이성애자 교육 네트워크)에 기부를 했다. GLSEN은 고등학생들이 동성애 성향을 밝힐 수 있게 도와주는 LGBT 단체다. 일부 사람들은 GLSEN이 학생들의 동성애 선택을 장려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 부분이 논쟁거리가 됐다. JP모건 프라이빗 뱅킹 이전에는 후원에 나선 기업이 없었다.

br>제스, 지금 대형 은행들에 대항하는 포퓰리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피터에게 배운 교훈 중 이런 상황에서 더 전략적으로 대처하는데 도움이 될 만 한 게 있다면?
제스: 동생에게 배운 건 비판적 사고와 균형 잡힌 상황 파악법이었다. 미국의 소득불균형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은행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도 많고, 어느 정도는 길을 잃었다고도 본다. 그러나 동료 중에는 인성과 가치관이 뛰어나고 관대한 성품을 가진 은행가들이 수 천 명은 된다. 지난 10년 간 월가가 잃어버린 신뢰를 조금이나마 되찾는 데 내 흔적을 남길 수만 있다면 멋진 업적이 될 것이다.


피터, 20년 전 여러 항레트로 바이러스제를 병용하는 효과적인 에이즈 치료법 ‘칵테일 요법’이 도입됐을 때, ‘어쩌면 나도 장수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피터: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이 거쳐간 과도기를 나도 겪었다. “한 해씩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지 1~2년 앞은 보지도 않았는데, 이제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의 과정이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10년 간 에이즈 운동가로 지내면서 너무 지친 상태였다.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 직업을 가질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2004년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 메타암페타민(필로폰)이 유행했을 때, 당신도 한동안 약물에 중독된 적이 있었다.
피터: 슬프게도 그랬다. 1996년의 변화를 경험한 우리들-HIV 양성 판정을 받은 동성애자들-중 상당수는 정말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일부는 약물 중독에 빠졌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얼마나 지속됐나?
피터: 2년 반 정도였다.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는 건) 여러 측면에서 내 삶 중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에이즈에서 살아남는 것보다 더 힘들었을 정도다. 약물을 끊은 뒤 중독 사실을 가장 먼저 고백했던 사람도 제스 형이었다.


약물 복용을 중단했을 때까지 제스에게 말하지 않았나?
피터: 중독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 전까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벗어났나?
피터: 처음엔 12단계 회복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이후 뉴욕 시에서 뛰어나다고 소문난 병원 통원치료를 통해 완전히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피터: 중독은 질병이고, 내가 흑인이었다면 감옥에 갔을 것이라는 점이다. 국가적으로 이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고, 순수한 공중 보건 측면에 초점을 맞춰 치료를 해야 한다. 내겐 통원치료 프로그램을 감당할 재정적 여력이 있었다. 모두가 그런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통원치료가 아니었다면 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에이즈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지금도 위기 상황인가?
피터: 그렇다. 우리가 80년대 미국에서 시작했던 일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에이즈 확산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다. 미국 내 연평균 신규 감염자 수는 여전히 90년대와 유사한 수준이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전 세계 감염자 수는 3,700만 명이며, 매년 신규 감염자 수와 에이즈로 인한 사망자 수도 각각 200만 명과 120만 명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젠 80~90년대와는 달리 이 수치를 적절한 수준까지 낮출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며, 실제로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 방법이란 바로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법이다. 이젠 매일 복용하면 HIV 감염을 막을 수 있는 약도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수록, 신규 감염자 수가 더 많이 줄어든다는 점을 배웠다. 이런 도구들과 약간의 자금만으로도 감염자 수를 줄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대선 캠페인에 HIV ? 에이즈 관련 내용이 들어가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제스, 지난해 12월 직원이 12만 9,000명에 달하는, HIV·에이즈 프로그램과 LGBT 지원에 앞장서 온 은행의 CEO로 취임했다. 당신이 앞으로도 더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나?
제스: 어떤 사회 문제든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진 않을 것이라고 본다. 성차별, LGBT 인권, 성적지향성, 인종차별 등 어떤 문제에서든 항상 개선의 여지는 있다.

피터: 형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항상 자극하려고 한다. 형이 소득불균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는 점이 정말 자랑스럽다. 민주당원이라는 점도, 같은 (대선) 후보를 지지할 때가 많은 것도 좋다. 나는 형에게 “혁명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농담을 하곤 한다.

제스: 우린 피터네 집에 숨을 거다(웃음).

피터: 난 형한테 전화해서 가족들을 챙겨 내보내라고 말할 거다. 난 혁명 본부에서 그 전화를 걸고 있을 테고.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BY PATRICIA SEE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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