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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 고발한 리스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60여년 시차 속의 두 사람은 각각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해밀턴은 신생국의 초대 재무장관을 맡아 미국 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히톨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광기의 지도자로 기억된다. 시대와 국적은 달라도 둘은 공통점이 있다. 이름의 이니셜이 AH 이며 부국강병을 정책 목표로 삼았다.

해밀턴의 보호무역과 극단적인 자국 우선주의가 히틀러에게 전달되는 데에 이 사람이 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히틀러는 리스트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는 영화까지 만들어 ‘리스트 부활운동’까지 벌였다. 리스트는 사분오열 상태인 게르만 민족의 앞날을 걱정한 우국지사이자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창시자. 당대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리스트의 사상은 독일을 비롯한 후발 산업국가들의 발전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개발연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택한 경제정책의 배경은 자유무역을 강조한 아담 스미스보다는 관세를 통한 유치산업 보호 필요성을 역설한 리스트에 가깝다. 죽의 장막을 걷고 경제 개발에 나선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은 마르크스의 경제학보다는 리스트의 국민경제학을 따랐다. 인도의 경제정책 역시 리스트의 보호무역, 자국 산업 우선 육성이라는 리스트와 맥이 닿는다.

생전의 리스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피혁업자의 아들로 1789년 태어난 그의 출발점은 공무원. 17세에 일종의 고시인 서기직 시험에 합격하며 승승장구, 27세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장관 보좌역까지 올랐다. 이듬해에는 튀빙겐 대학교의 정치학 교수로도 뽑혔다. 여기까지가 초년기 인생의 정점. 이후부터는 끝없는 추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독일의 개혁과 통일을 부르짖어 기득권의 눈 밖에 난 탓이다.

청년 리스트는 나폴레옹 군대가 전파한 자유주의 사상에 매료돼 입헌군주제 도입을 시도했지만 보수귀족들에게 밀려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정치 무대에 데뷔한 리스트는 무엇보다 역내 관세동맹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독일 지역은 군웅이 할거하던 상태. 느슨한 연방으로 묶인 35개 공국과 4개 자유도시가 제각기 통행료와 관세를 거뒀다. 심지어 같은 공국 안에서도 지역별로 관세를 매겼다.

외국과 교역하는 것보다 국내 물류 소통이 더 어려웠던 상황에 대해 리스트는 이렇게 한탄했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물건을 내가려면 10가지 관세 규정을 연구하고 세금과 통행세를 10차례나 물어야 한다. 팔다리가 꽁꽁 묶였는데 어떻게 피가 돌 수 있는가.’ 다행히 세력이 강한 프로이센 등의 주도로 역내 관세장벽은 점차 낮아졌으나 리스트는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위험분자로 찍혔다. 의회에 진출한 직후인 1822년 ‘체제를 무너뜨릴 급진주의자’로 체포돼 강제노동형을 치렀다.

‘미국으로 이주한다’는 조건으로 풀려난 리스트는 1825년 미국에 도착,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독일어 신문을 창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돕고 석탄과 철도사업에 투자해 돈도 벌었다. 학문도 익혔다.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이 보호관세 부과 및 유치산업 육성 방안을 담아 의회에 제출(1791년)했던 ‘제조업 보고서’를 공부하며 후발 산업국가가 택할 길을 익혔다. 리스트는 해밀턴의 궤적을 쫓으며 ‘수출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 공산품에 관세를 매겨 국내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망명지인 미국 생활은 더 없이 순탄했으나 조국을 잊지 못한 그는 잭슨 대통령에게 부탁해 함부르크 주재 미국영사 자격으로 1830년 독일로 돌아왔다. 망명 5년 만의 귀국한 그는 이번에도 미움을 샀다. 아담 스미스를 신봉하는 독일 주류 경제학자들의 자유무역주의론에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리스트는 당시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자유무역론은 영국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대변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며 맹공을 펼쳤다.



리스트는 독일 같은 ‘이류국가’는 보호무역과 따라잡기(catch up) 전략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경제의 중심인 영국에서 나오고 발전한 보편적 경제학이 독일의 현실에는 맞지 않으니 ‘경제학의 독일화’를 부르짖은 그는 강단을 독차지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 배척 당했다. 자유무역 아래에서 곡물을 영국에 수출해 막대한 이익을 얻던 동부 출신의 귀족지주(융커) 계급도 리스트를 꺼렸다.

독일을 시급하게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도 사방에서 공격 받았다. 독일의 각 지방에 눌러 앉아 ‘참호화한 귀족 기득권 세력’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철도 부설을 적극 추진하는 리스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리스트는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철도가 군의 이동과 집중 운용을 용이하게 만들 뿐 아니라 국민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경제 발달을 낳을 것’이라는 강연 활동을 펼쳤다.

리스트의 소망대로 독일의 철도는 급속도로 퍼졌다. 1835년에 처음 깔린 철도의 총연장이 1850년 5,800㎞, 1860년 11,600㎞로 늘어났다. 관세동맹 가입국들을 중심으로 교통시스템과 통화제도, 어음·도량형이 같아졌다. 경제통합은 1871년 강력한 통일국가인 독일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비스마르크의 철혈(鐵血)정책에 앞선 리스트의 노력이 오늘날 독일의 반석을 깐 셈이다.

그러나 리스트는 그토록 갈구하던 독일의 융성과 통일을 못 보고 죽었다. 온갖 세력의 음해와 견제 속에 독일 내 사업기반이 무너져 빚더미에 올랐다. 마침 영국에서 곡물법이 폐지돼 본격적인 자유무역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는 소식에 리스트는 더욱 낙담했다. 생활고에 찌들리던 그는 결국 숲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1846년11월30일, 권총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리스트의 이론은 계량적이지 못한 데다 순수 경제학이라기 보다는 각 나라의 역사와 사회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경제학의 본류에서는 큰 평가를 받지 못해 왔으나 최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 각광받는 분위기다. 어떤 나라든 처음에는 보호무역주의로 출발해 자신감이 생기면 자유무역을 주창하며 자신이 올라온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논리도 리스트가 대표작 ‘정치경제의 국민적 체계’(1841)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다.

리스트와 이론적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받는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에 따르면 알렉산더 해밀턴 뿐 아니라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도 보호무역을 강력 주장하며 미국 산업을 보호하려 애썼다. 미국은 경쟁력을 자신하게 된 2차세계대전 이전까지 고율 관세로 악명높던 나라였다.

독일을 사랑했기에 애써 형극의 삶을 살았던 프리드리히 리스트 사망 170년 주기에 두 가지가 떠오른다. 혼돈의 시대에 우리 만의 시각으로 앞날을 그려나갈 한국적 경제학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대통령 후보 시절 미국의 이익을 강조하며 보호무역으로 회귀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집권하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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