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소중한 행복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잊고 산다. 행복은 행복을 찾아내고 느끼는 자의 소유다.
어느새 9년 전 일이다.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있을 때,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에 있는 스리랑카 사찰 주지 스님의 부탁을 받았다. 아루샤에 사는 현지인 불자에게 휠체어를 전달해달라는 거였는데, 탄자니아 스리랑카 불교사원에 현지인으로는 유일한 불자다.
탄자니아에서 거래되는 훨체어는 새것이거나 고급 제품이 아니라면 대부분 구호품으로 들어온 것이라서 거저나 마찬가지다. 다르에스살람에서 싣고 가기보다 차라리 아루샤에서 구입하는 게 훨씬 더 저렴하다고들 한다.
나는 스님의 부탁을 받고 휠체어를 고속버스에 실었다. 버스 기사는 사람 운임의 두 배를 내라며 깎아줄 수 없다 했고, 나는 내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전달하는 것뿐이니 깎아달라며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두 사람의 운임비 5만6,000실링기에서 자투리 6,000실링기를 깎는 데 성공했다. 아루샤에 도착해 휠체어를 전달해주며 나는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데, 내가 배달한 휠체어는 남편이 사용하던 거였다며 반가워하는 모습에서 나 혼자만의 생각을 부끄러워했다. 떠나간 남편은 선천적 불구였고 자신은 이 남편과 만난 뒤 어쩌다 불구가 됐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마스터 기포스님, 매우 고맙습니다. 이 먼 거리를 수고해주셔서요. 예까지 이것 때문에 일부러 오셨는데, 킬리만자로에 가시려면 오던 길을 되밟아 한나절은 가셔야겠네요. 차편도 끊어지고. 너무 멀어서 어쩌지요?”
내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웬걸요. 가진 게 시간밖에 없습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넌지시 물었다.
“부군은요?”
“먼저 갔어요. 석 달쯤 됐나 봐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합니다”가 전부였다. 분위기를 바꾸려 했는데 되레 이상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말했다.
“제 남편의 평생소원이 있었습니다.”
내가 막 물으려는데 그녀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자기 두 발로 당당하게 걸어보는 거. 단지 그게 소원이었지요. 마스터, 제 남편 소원이 좀 우습지요? 저는 그래도 걸어봤잖아요.”
그녀는 고인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녀가 덧붙였다.
“휠체어 2개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남편도 이미 세상을 뜬 마당에. 그러나 세상 뜨기 전까지 앉았던 휠체어, 이게 제게는 남편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스터 기포스님에게 더 고맙게 생각해요.”
나도 함께 눈물을 훔치며 위로했다.
“네, 마마 안나, 힘내십시오.”
참 소박한 이야기다. 직립보행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이면서 직립보행하는 게 소원이라니,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우리는 모두 행복한 존재들이다. 이 다리로 축구하고, 피겨하고, 마라톤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걸을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소중한 행복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