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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씨의 #그래도_연애] 남친 대신 고양이를 기르게 된 까닭

■남자친구 대신 고양이를 키우다 - 악질 중 악질인 잠수부에 관한 이야기





나의 엑스(X)보이프렌드는 다정했다. 내가 토라졌을 때면 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를 때까지 온갖 애교를 부렸고 가끔 야근으로 지친 날에는, 마술처럼 회사 앞에 나타나 피로를 싹 날려버린 사람이었다.

애교를 부릴 땐 강아지 같고, 나의 푸념과 고민을 들어줄 때는 고양이 같았다. 남친의 다양한 변신 덕에 연애 초기엔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었다.



우린 3년 전 일본 도쿄에서 처음 만났다. 도쿄에서 바다를 찾는 내게 고탄다의 호텔 종업원은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해변가 한 곳을 알려줬다. ‘미기(오른쪽)’과 ‘히다리(왼쪽)’만 아는 내가 기특하게도 그 바다에 성공적으로 닿았을 때는 한국 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가 그때 널 ~ 잡았더라면 너와 나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아무도 없는 외국에서 모국어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건 짜릿한 쾌감을 준다. 그때 어디선가 그 멜로디에 맞춘 나직한 휘파람이 들려왔다. 만약 서울이었다면 나와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낯선 남자에게 위협을 느꼈겠지만, 외국에서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여긴 여행지였다. 떨어진 거리만큼 일탈이 허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일 모리미술관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다음날 오전 롯뽄기의 모리미술관을 거쳐 늦은 밤 신주쿠의 꼬치 골목에서 나왔을 즈음 우린 이미 연인이 돼 있었다.

He is...

그는 살면서 반듯한 길만 걸어온 사람은 아니었으나 일에 있어선 칼 같았고 약속도 잘 지켰다. 적어도 연애 초기 내가 본 그는 그랬다.

성실한 남자. 한 두 번 방황을 겪고서도 군대 제대 후 맘먹고 공부를 시작해 몇 명 뽑지 않는다는 감평사(감정평가사)가 된 사람이었다.

일에는 철저하고 여자친구에도 다정한 그런 느낌을 주는 ‘희귀한’ 좋은 남자였다.

그때까진 그랬다


사귄 지 몇 달 후 알게 된 뉴스는 그에게 엄청난 잠수부 기질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귀여운(?) 수준이었다.

밤 11시

나 : 자기야 어디야?

…읽씹…(아니, 분명히 읽었는데 ㅠㅠ)

3시간 후

나 : 또 꼭꼭 숨었네ㅠㅠ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메시지 보면 답변 좀 해줘~~

뭐지... 내가 뭐 잘 못한 게 있나...도대체 뭐가 문제지 ㅠㅠ


4시간 후

나 : 아니 도대체 어디냐고 사람 걱정되게 !!!

하루 가까이 연락 없었던 그였지만 다음날 카톡 프사는 바뀌어 있었다. 분명 밤새 야근을 했거나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신 줄 알았던 그는 나노 레고 세 개를 떡하니 프사에 올려놓았다. 헐~~~



‘이 남자 도대체 뭐야…’

나중에 알고 보니 그에게는 남다른 이력이 있었다.

그는 국민 게임이라는 롤(리그 오브 레전드)을 군대 싸지방(사이버 지식 정보방)에서 처음 만났다. 상병이 돼 처음 받게 된 9박 10일의 휴가 내내 바로 PC방에 휴가 신고를 하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휴가를 나왔다가 들어갔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연애 초기 만났던 그의 절친은 나에게 ‘서경씨, 얘 그때 롤 때문에 탈영은 안 한 게 신기할 정도에요’라며 묘한 웃음을 남겼지만, 당시 난 그게 무슨 뜻인지, 무슨 상황을 예고하는 지 전혀 예측을 못했다. 롤이라면 내 동생도, 내 친구들도 다 사족을 못썼으니까. 그냥 그 정도로 빠져있는 건 줄만 알았다.





그의 잠수 주기는 길어졌고 횟수는 더욱 잦아졌다.

그가 한동안 잠수를 탈 때마다 나는 조바심에 수많은 카톡과 부재중전화를 남겨 놓았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 다음엔 걱정이 됐고, 마지막엔 지쳤다. 그렇게 지쳐갈 때쯤 그는 홀연히 나타나곤 했다.



나 : 너한테 나는 뭐야?

남자친구 : 나한테 제일 소중한 거? 내 눈에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나 : …….

남자친구 : 왜 그래? 내가 며칠 혼자 뒀다고 삐친 거야?

나 : 왜 소중한데도 나를 혼자 둬? 왜 내가 기억이 안 나? … 너는 내 앞에 롤도 잇고, 오버워치도 있고 맨날 새로운 게 있잖아

남자친구 : 아냐 아냐 ...너가 제일 우선인데 내가 그땐 눈이 확 돌았나봐, 진짜 내가 미쳤나 봐. 미안해, 한번 만 봐줘~~

그때뿐이었다. ㅂㄷㅂㄷ...우린 이런 패턴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난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래...자기가 인정하니까 달라지겠지, 달라질거야. 달라질 수 있어...

참을 인자를 끝도 없이 새겼다 ㅠㅠ


그가 또 한 번 잠수를 탔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포켓몬고 때문이다. 그는 단지 포켓몬 성지를 돌아다니며 포켓몬을 수집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일대의 체육관을 다 점령했다.

거기다 포켓몬 정보를 나누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운영한다.

그것도 난 주변 사람들에게 듣게 된다. 그는 잠수를 타고 있으니까...



난 오늘 잠수를 탄 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남겼다. 아마 이것도 한참 뒤 내가 생각난 뒤에나 답장이 오거나 뒤늦게 회사 앞으로 찾아 오겠지. 날 외롭게 하는 남자친구 대신 난 나만 바라봐 줄 고양이를 샀다.

/잠수부가싫은기자 sednew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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