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내외 기관들이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잇따라 하향 조정하면서 한국 경제의 앞날에도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하지만 조기 대선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차기 정부를 이끌어가겠다는 대선주자들은 정작 ‘재벌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앞다퉈 대기업들을 옥죄는 공약만 쏟아내며 눈총을 사고 있다. 결국 밖으로는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 조치에, 안으로는 정치권의 반기업적 정책으로 이중고에 처한 국내 기업들의 시름만 깊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오는 5월9일로 확정된 19대 대선에서 대권 도전을 선언한 대선주자들은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기업의 정상적 경영활동을 위축시키는 반기업 정책들을 공약으로 쏟아내고 있다. 먼저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월 발표한 1호 경제공약으로 ‘4대 재벌개혁’을 내걸고 있다. 문 전 대표는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 길은 재벌개혁”이라며 삼성·현대자동차·SK·LG 등 4대 재벌개혁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구체적 정책으로 집중투표제·다중대표소송제 도입과 더불어 노동자추천이사제라는 감시장치 마련을 제시했다.
거침없는 ‘사이다’ 발언으로 유명세를 올리고 있는 이재명 성남시장은 사실상 재벌해체에 가까운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 시장은 “재벌의 과도한 초과수익을 세금으로 환수해 국민소득을 늘려야 경제가 살아난다”며 법인세 인상과 비과세 혜택 폐지 등을 주장하고 있다. 또 그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편법승계로 3조원의 이익을 거뒀다며 ‘한국판 리코법(조직범죄재산 몰수법)’ 제정도 촉구하고 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도 국내 산업구조를 동물원에 빗대며 줄기차게 재벌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동물원 구조”라며 재벌 지배구조 통제 강화와 법인세 실효세율 인상 등을 주장하고 있다. 안희정 충남지사 역시 “대기업과 재벌의 독점적 지위 등은 반드시 개혁할 것”이라며 순환출자제도 개선과 자사주 의결권 제한 등을 공약으로 추진하고 있다.
재벌개혁을 주창하는 목소리는 보수 진영도 예외가 아니다. 바른정당 대선주자인 유승민 의원은 출자총액제한제도 강화와 기업 총수의 사면·복권 금지 등 진보정당 못지않은 공약들을 내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인기영합적 대기업 정책이 우리의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탄핵 이후 조기 대선 국면으로 돌입하면서 유권자들의 표심을 의식한 대선주자들이 더 많은 재벌개혁 공약들을 쏟아낼 것”이라며 “국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실효성 없는 과거 정책들을 재탕, 삼탕 하는 것을 보면 과연 누구를 위한 공약인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검찰은 대기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최근 면세점 인허가를 담당하는 관세청 직원들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면세점 입찰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에 대한 뇌물공여 의혹을 받고 있는 SK·롯데를 겨냥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 소환조사를 앞둔 검찰이 대기업 뇌물혐의 수사도 본격 착수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역대 대선 가운데 ‘반기업 정서’가 가장 노골화되면서 재계는 노심초사하고 있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경제성장률 전망이 2%대 중반까지 떨어지는 초유의 위기 상황인데도 대선주자들은 이를 극복할 혜안은 전무하고 그저 재벌을 공격해 표를 얻자는 선거 공학적인 행보만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미국·중국·일본의 통상압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기업규제를 강화하는 정책들이 현실화하면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도 동반 추락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은 “해외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기업들은 이미 핸디캡을 안고 싸워야 하는 셈”이라며 “재벌개혁은 기업은 물론 국민들까지 모두 패배자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현상·윤홍우·김지영기자 kim0123@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