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의 아침은 커피로 시작된다. 새벽이면 집집마다 어머니들이 무쇠판에 커피콩을 볶는 향기가 가득하다. 커피를 낮은 불에 천천히 끓여 내오면 가족들이 한데 둘러앉아 석 잔을 나눈다. 첫 잔은 가족의 우애를, 둘째 잔은 공동체의 평화를, 셋째 잔은 서로의 축복을 비는 마음이 담긴다. 이렇게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분나 마프라트(커피 세리머니)’라는 아침의식으로 하루를 연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에는 세계 평화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지난 1824년 완성된 이 교향곡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에 음악을 입힌 합창곡 ‘환희의 송가’로 대미를 장식한다. “백만의 사람들이여, 모두들 껴안아라. 온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형제여….” 전 세계 음악 애호인들은 지금도 ‘합창교향곡’을 들으며 베토벤이 품었던 인류애와 공존의 열망을 함께 나눈다.
그러나 폭력과 독선은 언제나 인류에게 상처를 남겼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가한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오죽했으면 축복을 뜻하던 ‘묻지마라 갑자생(甲子生)’이라는 속담이 정반대로 저주의 상징으로 변질됐을까.
본래 갑자는 육십갑자 중 맨 처음이라 역사적으로 빼어난 인물이 많이 태어나기 마련이라는 의미로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만들어져 쓰였다. 갑자생은 물어보나 마나 길운(吉運)을 타고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1924년 갑자생이 일제시대에 겪은 지독한 고난 탓에 말뜻이 달라졌다. 어려서는 우리말과 얼을 뺏긴 채 자라난 이 세대는 청년기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해 징용과 학병으로 숱한 목숨을 잃거나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병영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해방 이후에도 38선으로 두 동강난 나라에서 수많은 폭동과 소요 끝에 6·25전쟁까지 터져 서로를 죽여야 했고, 30대 이후에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의 풍파를 겪는 등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1924년 갑자생들은 굳셌다. 이들은 하나같이 ‘나는 고생했지만 아이들만은 공부시켜서 그런 고생을 하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자식을 키웠고, 그 일념이 경제적 번영과 정치 민주화의 밑거름이 됐다.
2017년 정유년은 일제의 폭력으로 상처 입은 1924년 갑자년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올해는 출발부터가 좋지 않다.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거슬러 헌법 질서를 허물었고, 끝내 뉘우치지 않다가 파면되고 구속까지 됐다. 바깥 사정을 봐도 미중 대결의 격화와 북한의 잇단 도발로 한반도와 주변 정세가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다.
난국이다. 하지만 극복할 수 있다. 독선과 대결이 아닌 공존과 화합의 길로 들어서기만 한다면 말이다. 때마침 올해는 닭의 해로 화합의 기운이 내재해 있다. 닭은 먹이를 먹을 때 반드시 무리와 함께해서 예로부터 공존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또한 닭은 어둠을 뚫고 여명을 알리는 상서롭고 신통력을 지닌 서조(瑞鳥)로 생각되기도 했다.
베토벤의 음악적 스승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음이 내는 것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의 침묵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오케스트라의 멋진 하모니를 위해서는 제 실력만을 뽐내려는 현란하고 큰 소리보다 서로의 조화를 위한 배려와 자제가 필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국가시스템과 경제 개혁, 강대국의 패권 저지 등 안팎의 과제는 누구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그런데도 19대 대선을 불과 한 달 앞둔 지금 대권 주자들은 유아독존에다 상대방 헐뜯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에게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을 권하고 싶다. 하나 더, 우리도 ‘분나 마프라트’ 같은 아침의식을 가져 보면 어떨까. 꼭 커피가 아니라도 무엇이든 첫 잔에 우애를, 둘째 잔에는 평화를, 셋째 잔에는 축복을 빌면서 저마다의 하루를 열어보자. /문성진 문화레저부장 hnsj@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